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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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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0일 22시 42분 등록
등나무는 올해도 꽃을 피웠다. 푸르고 건강한 잎이 그늘을 짙게 드리운 사이로 보라색 꽃은 연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무슨 이유로 내 가게 앞에 이 등나무를 심고자 했는지 모른다. 다만 이 이국의 땅에 한국의 한 부분을 옮겨 오고 싶었던 어느 날 이 등나무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그 보라색 꽃이 못 견디게 그리웠고 이 만리 타국에 그 꽃을 피우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 번 근처 꽃 시장에 갔을 때 한 덩이를 사서 우리 가게 앞에 심었다. 그것들은 이제 제법 커서 우리 가게 앞에 벤치 앞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다. 이제 이 등나무는 우리 가게의 상징이 되었다. 보라색의 연한 꽃이 축축 늘어지는 시기가 오면 사람들은 우리 가게를 보라색 꽃이 피는 가게라고 부른다. 나는 그들이 부르는 내 가게의 이름이 매우 좋았다. 그 이름에는 한국이라는 향기가 함께 묻어 나오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아직 때로는 못 견딜 정도로 두고 온 한국땅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들의 시끌 벅적함,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속도감,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삶에 대한 끈적끈적한 애정, 환멸감을 일으킬 정도의 속물근성, 그들만이 가지는 경쟁심.

그 곳에 있을 때 그것들이 그리 재미나고 소중한 것들인지 전혀 몰랐었다. 세월이 흘러 이 한적하고 차분한 곳에 살면서 나는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었는지 다시금 생각한다. 돌이켜 생각건대 나는 그 곳에서 많이 고민했었고 많이 치열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땅을 떠나온 것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나라의 구조 안에서해결할 수 없는 것들의 한계를 넘어서 이 낯선 땅을 찾았다. 사실 이 땅에서도 한계는 있었다. 나는 이국인이었고 이 분야에 대해서도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그 한계를 무시하기가 훨씬 쉬웠다. 주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고, 우리 부모님에 대한 체면을 지킬 필요가 없었고, 내 나이에 대한 장벽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약간 외로웠지만 자유로웠다.

여기에 나는 내 가게를 가지고 있다. 그 곳에서 ‘아름다움’을 판다. 아름다움, 그것이 내가 내 인생에서 추구하고 있는 마지막 지점이라는 사실을 어느 날 문득 알아버렸던 것이다.

화랑의 주인으로서 나의 일상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아름다움들을 찾아 헤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때는 예술가의 집을 직접 방문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옥션에 참가 하기도 한다. 때로는 뒷골목의 허름한 가게나 벼룩 시장에서 그 아름다움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찾아 헤맬 때 나는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어린 아이와 같다.

그러니까, 그 옛날 내가 찾아낸 나의 능력은 이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능력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질 못했었다. 오히려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에 가까웠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 하면서 나는 이 길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취미였다. 답답하고 허전한 주말 시간을 메우기 위해 내가 찾은 소일거리, 그것이 바로 화랑가를 들락 거리던 일이었다. 회사 생활 그것의 반복되는 피곤함과 그 지겨움을 날려 버리기 위해 나는 홀로 그 길들을 걸어 다녔다. 돈이 그리 많이 드는 일도 아닌 데다가 걷는 것을 좋아하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딱 맞는 취미였다.

초기에 그 취미를 시작했을 때에는 남들과는 다른 것들을 해 보고 싶다는 ‘오만함’이나 그걸로 뻐기고 싶다는 ‘속물 근성’ 같은 것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것에 빠져 들었고 그것이 그 동안 찾아 헤매 이던 ‘나의 영역’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랬다. 그것은 단순한 취미 생활 이상이었다. 나는 작가들이 형태나 색깔로 만들어 놓은 그 작품들 앞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 냈고 온 몸으로 그들이 말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읽어 냈다. 어떤 때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작품을 읽어내는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섭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걸 통해서 나를 내 자신을 바로 보게 되었다. 사실, 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듯 무디고 건조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많은 것들을 내 감성으로 읽어 냈고 그 감성으로 읽어 낸 이야기를 내 특유의 스토리로 풀어 내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가느다랗게 보이는 내 재주를 붙들었다. 그것들이 언젠가는 큰 재주로 키워질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서서히 내 꿈과 현실과의 간극을 좁혀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친한 화가의 그림을 이야기로 풀어 내는 책을 한 권 냈다. 직장 생활 중에 내는 책이라서 육체적으로는 참 힘든 과정이었다. 주말을 오롯이 거기에 투자했고 내 안에 들어 있는 스토리를 끌어 내기를 힘들게 힘들게 반복했다.

그것이 이 길로 오는 길의 첫 발자국 이었다. 그랬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어려운 일이 없었다면 새빨간 거짓말일 게다. 그러나 나는 그 길에 숨겨진 그 고통까지도 모두 사랑했었다. 남들이 모두 늦었다고 말하는 나이에 새로운 길에 들어서면서도 나는 힘들지 않았었다. 금전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모든 것들이 완벽하지 않았었지만 덕분에 나는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가 있었다. 그런 고마운 맘을 먹는 순간마다 내 앞에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났었다.

내가 오늘 아침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갑자기 생각난 한 가지 영상 때문이었다. 한 10년 전 쯤일까? 나는 내 인생의 천복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많은 것들이 생각이 났지만 어떤 것이 내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매일 밤 이상한 악몽을 꾸었고 나는 꿈 속에서 쫓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꿈 속에서 어딘가로 자꾸 쫓기고 있었다. 더 이상 쫓기면서 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더 이상 도망갈 힘이 없어서 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나를 쫓아 오던 그것 앞에 맥을 풀고 누워 버렸다. 긴장이 풀렸고 그 순간 무언지 모를 거대한 힘이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힘에 내 몸을 맡겨 버렸다. 그러자 사방이 고요해 졌다. 내 머리 속에 모든 시끄러운 소리들이 꺼졌고 그제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겨우 내 심장이 팔딱 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와 함께 내 눈 앞에는 선명한 그림이 하나 떠올랐다.

처음 보는 이국의 거리였다. 벽돌이 가지런히 놓인 이국의 거리에는 등나무 넝쿨이 우거져 있었고 시원스런 그 초록의 이파리들 사이에 보라색 꽃들이 축축 늘어져 있었다. 그 넝쿨들 너머에 내 가게가 있었다. 내 가게의 오른쪽으로 조그만 골목이 나 있었는데 그 골목길을 따라 내가 걸어 오고 있었다. 까만 정장을 입은 나는 가게 앞에 서 있는 까만 세단 승용차에 올라 탔다.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나를 반겨 주었다.

당시 나는 그 영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이었다. 건강한 푸른 잎들이 그늘을 드리운 사이로 보라색 등나무 꽃이 늘어져있는 내 가게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 영상이 생각이 난 거다. 그리고 보니 나는 오늘 까만 정장을 입고 있다. 조금 있다 브라이언이 나를 태우러 올 차도 까만색 세단이다.
IP *.56.8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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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8.11 00:10:28 *.36.210.157
우후, 멋진걸.

까만 정장, 브라이언, 세단...

그런데 나는 정말로 네가 옥션에 참가하는 게 가장 잘 어울려 보여. ㅎㅎ

삼삼하고 근사한 미래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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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1 22:29:19 *.123.204.118
구라현정. 딱 맞는 말이야.
오늘도 훌륭한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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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8.08.12 07:16:24 *.213.88.196
미래에 대한 풍광인가?
재미있고 멋진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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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칸양
2008.08.12 10:03:56 *.122.143.151
어디까지가 팩트고 어디까지가 구라인지,
헛갈리게 만드는 좋은 글이여~..
아마도 현정을 보지 못하고 글만 읽는 사람은 더욱 헛갈릴거야..
저자가 도대체 어떤 여인네일지, 감 잡기 힘드겠지?
나도 읽다보면 자꾸 현정의 얼굴과 매치가 안되는데,
다른 사람이야 오죽 하겠어..
구라... 대단한 재능이야... 부러워... "구라재우"도 멋진데...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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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8.12 10:44:04 *.127.99.61
드디어 명확한 그림으로 재창조해내었구먼, 멋진 걸!
어느 날 그 집가서 차 한잔, 밥 한끼, 아니 며칠 빈대 붙을 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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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2 21:33:27 *.228.146.136

사기 번개는 거기서. 멋지다. 상상만으로도 잘어울려.
그대로 주욱,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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