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 조회 수 1845
- 댓글 수 1
- 추천 수 0
일상에 욕망이라는 것이 있다면
마침내는 주식과 아파트 얘기를 할 터인데 웃지 못할 일에 동조하며 웃어야 하는 억지 웃음이 그저 슬픈 표정을 짓는 것보다 슬퍼서 그랬다. 한 번 가면 오지 않는 생이고, 죽으면 썩어질 몸이라 삶은 참으로 허망하고 무상한데, 그렇게 방금 얘기해 놓고선 재빨리 표정을 고쳐 지난 번 산 주식이 두 배로 오른 것과 버린 셈치며 가지고 있던 아파트의 값이 올랐다는 데 얼굴을 무너뜨리며 기뻐하는 걸 보면 어째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일이 그런 것들 밖에 남지 않았을까 하고 슬픈 것이다.
그래, 기함 하겠지마는 술 마시자는 사내들의 요청을 뿌리치고 나는 아내에게로 간다. 아내에게로 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듣고, 싱거운 농담을 주고받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한다. 산책을 하며 팔을 끝까지 뻗었다가 몸을 뒤틀고 고개를 젖히다 먼 별을 보며 감탄한다. 차에 밟혀 내장이 터진 채 길가에 널브러진 개구리를 아무 느낌 없이 지나치고 가끔 떨어진 프렌지파니 꽃을 주워 냄새를 빨아 마시고 다시 조신하게 버린다. 산책하며 집주인 욕을 하기도 하고 지난 날 고마운 사람을 불러내 지금은 어찌 지내나 궁금해하기도 한다.
이 단촐한 의식 같은 하루의 마무리가 그저 똥 같은 삶을 그래도 살만한 삶으로 바꾸는 것이다. 오랜 동지처럼 서로의 마음을 토닥이는 아내와의 잡스러운 대화는 하루 중 큰 기쁨이다. 나조차 자기기만의 하루를 보내며 나에게 지배를 받다가 그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고 놓여나서 더는 지배하지 않는 유일한 해방의 이 시간을 어찌 마다 할 것인가. 술자리를 늘 거절하여 미안하지마는 친구여, 나에겐 볼 일이 있는 것이다.
산수유 꽃 날리던 날, 시원한 계곡 끝에 편평한 바윗돌을 찾아 허리춤 차고간 술을 꺼내고 병뚜껑에 나눠 마시며 드러누웠던 날, 하늘에 흰구름, 나뭇잎 사이로 내려앉는 햇살에 나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환하게 웃었다. 계곡 물 소리, 연두색 풀꽃들, 노란색 산수유 꽃에 끊임없이 웃어재끼던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지만, 세상에, 그녀와 그런 웃음이 있었다.
유성이 비처럼 내리던 밤, 큰 놈과 침낭을 나눠 덮고 방금 꺼진 모닥불 잔불 냄새 맡으며 별과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 오,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을거라, 별과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 마침내 눈이 커졌을거라, 별과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그 말을, 세 번 내뱉으며 침낭 자크를 올리고 경이로운 하늘을 봤지. 추운 겨울 감탄하며 침묵했던 5분, 그렇게 가슴 뛰고 재잘대던 침묵도 없었을 테지.
두 해 전, 우리 10년 뒤 어떤 모습일지 하얀 종이에 그려보자고 딸이 말했다.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얼얼했던 머리를 쥐어뜯으며 시간을 더 달라, 더, 더 하며 마침내 완성한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던 때,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그림을 설명하며 딸은 환한 얼굴이 되고 이미 댄스 가수가 되어 있었다. 먼데서, 다른 사람들과 젠체하고 꿈을 얘기했었다. 내 앞에 딸아이의 모습으로 다가와 앉아 있던 신을 몰라보았다. 아, 그래서 얼얼했던 것이다.
나에게 욕망이 하나 있다. 주식과 아파트와 연봉과 집의 평수가 침범하지 않는 일상을 늘려 나가는 것, 한번뿐인 짧은 내 삶이 나보다 긴 수명을 가진 것들로 인해 훼손되지 않게 하는 것, 내가 죽어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들에 내 단명함이 갉아 먹히지 않게 하는 것이 내 일상의 욕망이다.
누군가 제게 물었죠, 인생은 전쟁아니면 사랑이라는 데 너는 어느 쪽이냐고, 전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했었다고 그런데 그 전쟁같은 삶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앗아 갔다고 말했었죠.
어린시절, 주기도문외워서 사탕받으러 형과 누나들을 따라 가던 일요일 교회가는 길, 사람들은 늘 웃고 기쁘게 찬송했었는데,,, 또 어머니 잔등에 엎혀 간 절 스님 몰래 부처님 무등타고서 절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내려다 보며 느끼던 묘한 안도감... 방학 때 외가 너른 마당에 깔린 멍석위에 누워 모기불 사이 높은 7월의 밤하늘을 수 놓던 은하수를 보며 이모와 외삼촌의 도란도란한 이야기에 잠들던 편안함... 그 모든 것들은 아주 오래 전에 잊혀 젔고 지옥과 천당 사이의 갈림길을 헤매이며 되돌아 올 때 마다 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더 높이 더 멀리 세상을 떠돌다가 나는 허울 뿐인 명예와 긍지 권위에 갇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잃었었습니다.
그런 내게 명예도 지위도 권위도 다 버리고 '한 걸음 더 !' 지나 온 그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아프고 힘겨운 한 걸음을 내 딛게함을 감사하며 '나 새롭게 ... 그렇게 만신창이가 됐지만 온 몸과 마음으로 소박한 일상을 감사할 수 있는 삶으로 회귀할 수 있게 해 주신 신과 운명 앞에 아직 살아 있음을 감사드림니다. 그리고 여기 내게 새 삶의 시작을 주신 스승, 그의 그늘에서 깊은 절망과 좌절에서 다시 일어나 한 걸음을 떼기 시작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