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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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을 바꾸다
9년간 다닌 회사를 떠났다. 이제 딱 한 달 지났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인 먼지를 한 겹 한 겹 벗겨내고 있다. 오늘은 한 달 동안 한 번도 펴보지 않은 플래너를 집어 들었다. 지난 기억속의 것들을 모조리 모아 버릴 것은 버렸다. 여러 서류뭉치까지 뒤섞여 뚱뚱하고 볼품없던 플래너가 가볍고 날씬해졌다. 그래도 어떤 것은 추억 속에서라도 잠시 더듬을 수 있을까 하는 심정으로 명함과 함께 상자에 넣었다.
어제 둘째 재민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아내가 걱정 끝에 결심했는데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평일 날 그것도 아이들이 없는 집에 아내와 함께 있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아내에게 조조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아내 왈. 조조영화시간이 지났단다. 아내는 조조영화 대신 방을 바꿔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지금 서재는 조그만 방이어서 책장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반도 넘게 잡아먹고 있었다. 그동안 밤이나 새벽에 주로 앉아있던 곳이어서 잘 몰랐는데 낯에도 어두침침한 것이 오랜 시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에는 영 시원찮을 것 같았다.
문제는 안방에 있는 침대다. 어른 세 명 정도는 족히 누워 잘 수 있는 크기여서 작은 방에 들어갈지 걱정됐다. 그리고 이놈의 침대가 어찌나 무거운지, 사실 나는 침대를 옮기기 싫었다. 난 그냥 집 앞 성포도서관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산속에 자리 잡고 있어 조용하고 공기도 맑은데다 약수터까지 옆에 있어 책 읽고 공부하기에는 딱 이라고 생각하던 터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아내의 “방을 옮기자”는 한마디에 나는 그동안 상상했던 것들을 구름 속으로 던져야 했다.
작은방에는 책장 4개와 침대가 들어가니 꽉 찼다. 침대를 뺀 안방에는 책상과 책장 하나만 들여놓았다. 오전에 침대와 책상 그리고 책장 옮기는 일을 마치고는 아내와 기운 쓴 기념으로 돼지갈비를 먹었다. 아내는 속이 좋지 않아 별로 먹지 못했다. 나는 아내 몫까지 다 먹고 냉면까지 먹었다. 이 포만감을 유지하기 위해 한숨 자줬다.
오후 늦게 모니터와 의자를 보러 마트에 갔다. 어제까지 쓴 모니터는 10년 전에 최신형이었던 CRT 평면 모니터다. 지금 쓰고 있는 책상이 꽤 큰 편인데도 그 모니터 때문에 책상이 좁아 LCD 모니터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에 기회다 싶었다. 그동안 생각해둔 멋진 녀석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골랐다. USB도 모니터 옆에서 꽃을 수 있고 높낮이까지 조절되는 최신형이다. 까맣게 빛나는 바깥 테두리가 맘에 꼭 든다. 회사를 그만두고 프린터가 없어 출력을 못해 불편한 기억이 떠올라 레이저 프린터도 카트에 옮겼다. 의자도 골랐다. 이것저것 다 앉아보고 제일 맘에 드는 놈으로 골랐다. 그런데 그게 가장 비쌌다. 아내가 두 말 않고 그것으로 하자고 한다. 카트에 실었다.
어제 종일 방 정리를 하고 나니 오늘 아침 새로 이사 온 기분이다. 새로 꾸민 공부방이 아주 맘에 든다. 오른 쪽 창문으로 노적봉 아카시아 나무가 손짓한다. 작은 방에 있을 때는 잘 들리지 않던 매미소리가 우렁차다. 아파트 장터에서 사온 ‘녹 비단’ 화분을 창틀에 올려놓았다. 널찍이 큰 잎이 작은 나무를 닮은 선인장인데 꽤 귀엽다. 두 달 전에 구입했던 화분의 화초가 자리 잡기가 힘들었는지 풀이 죽어가더니 여름 뙤약볕을 이기지 못하고 말라죽었다. 어제 그 녀석을 묻어주고 아내가 산세베리아를 옮겨 심어 곁에 두었는데 마치 훨훨 타오르는 초록색 불꽃같다. 이렇게 방을 옮겨 꾸미고 나니 이곳에 앉아있는 시간이 즐겁다. 굳이 도서관에 갈 이유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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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간 다닌 회사를 떠났다. 이제 딱 한 달 지났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인 먼지를 한 겹 한 겹 벗겨내고 있다. 오늘은 한 달 동안 한 번도 펴보지 않은 플래너를 집어 들었다. 지난 기억속의 것들을 모조리 모아 버릴 것은 버렸다. 여러 서류뭉치까지 뒤섞여 뚱뚱하고 볼품없던 플래너가 가볍고 날씬해졌다. 그래도 어떤 것은 추억 속에서라도 잠시 더듬을 수 있을까 하는 심정으로 명함과 함께 상자에 넣었다.
어제 둘째 재민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아내가 걱정 끝에 결심했는데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평일 날 그것도 아이들이 없는 집에 아내와 함께 있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아내에게 조조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아내 왈. 조조영화시간이 지났단다. 아내는 조조영화 대신 방을 바꿔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지금 서재는 조그만 방이어서 책장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반도 넘게 잡아먹고 있었다. 그동안 밤이나 새벽에 주로 앉아있던 곳이어서 잘 몰랐는데 낯에도 어두침침한 것이 오랜 시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에는 영 시원찮을 것 같았다.
문제는 안방에 있는 침대다. 어른 세 명 정도는 족히 누워 잘 수 있는 크기여서 작은 방에 들어갈지 걱정됐다. 그리고 이놈의 침대가 어찌나 무거운지, 사실 나는 침대를 옮기기 싫었다. 난 그냥 집 앞 성포도서관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산속에 자리 잡고 있어 조용하고 공기도 맑은데다 약수터까지 옆에 있어 책 읽고 공부하기에는 딱 이라고 생각하던 터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아내의 “방을 옮기자”는 한마디에 나는 그동안 상상했던 것들을 구름 속으로 던져야 했다.
작은방에는 책장 4개와 침대가 들어가니 꽉 찼다. 침대를 뺀 안방에는 책상과 책장 하나만 들여놓았다. 오전에 침대와 책상 그리고 책장 옮기는 일을 마치고는 아내와 기운 쓴 기념으로 돼지갈비를 먹었다. 아내는 속이 좋지 않아 별로 먹지 못했다. 나는 아내 몫까지 다 먹고 냉면까지 먹었다. 이 포만감을 유지하기 위해 한숨 자줬다.
오후 늦게 모니터와 의자를 보러 마트에 갔다. 어제까지 쓴 모니터는 10년 전에 최신형이었던 CRT 평면 모니터다. 지금 쓰고 있는 책상이 꽤 큰 편인데도 그 모니터 때문에 책상이 좁아 LCD 모니터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에 기회다 싶었다. 그동안 생각해둔 멋진 녀석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골랐다. USB도 모니터 옆에서 꽃을 수 있고 높낮이까지 조절되는 최신형이다. 까맣게 빛나는 바깥 테두리가 맘에 꼭 든다. 회사를 그만두고 프린터가 없어 출력을 못해 불편한 기억이 떠올라 레이저 프린터도 카트에 옮겼다. 의자도 골랐다. 이것저것 다 앉아보고 제일 맘에 드는 놈으로 골랐다. 그런데 그게 가장 비쌌다. 아내가 두 말 않고 그것으로 하자고 한다. 카트에 실었다.
어제 종일 방 정리를 하고 나니 오늘 아침 새로 이사 온 기분이다. 새로 꾸민 공부방이 아주 맘에 든다. 오른 쪽 창문으로 노적봉 아카시아 나무가 손짓한다. 작은 방에 있을 때는 잘 들리지 않던 매미소리가 우렁차다. 아파트 장터에서 사온 ‘녹 비단’ 화분을 창틀에 올려놓았다. 널찍이 큰 잎이 작은 나무를 닮은 선인장인데 꽤 귀엽다. 두 달 전에 구입했던 화분의 화초가 자리 잡기가 힘들었는지 풀이 죽어가더니 여름 뙤약볕을 이기지 못하고 말라죽었다. 어제 그 녀석을 묻어주고 아내가 산세베리아를 옮겨 심어 곁에 두었는데 마치 훨훨 타오르는 초록색 불꽃같다. 이렇게 방을 옮겨 꾸미고 나니 이곳에 앉아있는 시간이 즐겁다. 굳이 도서관에 갈 이유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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