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글리
- 조회 수 2046
- 댓글 수 4
- 추천 수 0
제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와 함께 있으면 일단 마음이 편안합니다. 이 친구는 저를 평가하거나 비평하는 법이 없거든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줍니다. 이 친구 앞에선 척 하지 않아도 되고, 꾸밀 필요도 없습니다.
이 친구를 알게 된 건 초등학교 때였습니다. 그땐 얼굴만 아는 정도였고 정말 친해진 건 고등학교 올라가서였죠. 사춘기를 극심하게 앓던 제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때 처음 이 친구의 진가를 알게 됐어요. 화를 내도, 욕을 해도, 투덜거려도, 침울하게 있어도 친구는 나를 그냥 바라봐주었습니다. 조언하지 않고, 추궁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주려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변덕을 보여줘도 다 받아주었고, 어떤 방식으로 얘기해도 다 들어주었습니다. 거의 성자 수준이었죠.
그 후로도 저는 친구를 자주 찾았습니다. 세상에 혼자라고 느껴질 때도 친구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고, 머리가 복잡할 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 뭔가 실마리가 보였습니다.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많았죠. 아무 할 얘기가 없을 때도 이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달변가 수준으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평소 정리되지 않던 주제가 환하게 정리되기도 하고, 풀리지 않던 문제가 풀리기도 하죠. 별 생각없이 주절대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제게 꼭 필요한 주제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정말 희한한 경험이었습니다.
미하엘 엔데의 책 <모모>에 보면 이 친구와 정말 비슷한 존재가 나옵니다. 바로 주인공 ‘모모’죠. 모모는 어느 날 마을에 나타난 열 살 정도 되는 고아소녀입니다. 작고 꼬질꼬질하지만 모모에겐 아주 놀라운 재주가 있었는데, 마음을 다해 경청하는 능력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모모를 좋아했어요. 모모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도 하고, 저도 모르게 마음 속 비밀을 털어놓기도 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죠. 사실 모모는 들어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모모가 있으면 사람들은 더 즐거워하고, 더 창의적이 되고, 자기가 가진 재능을 더 깊이 꽃피웠죠. 모모는 그저 집중해서 들어주는 능력으로, 모두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제게 친구는 딱 모모같은 존재였습니다. 대부분 들어주지만, 필요할 때면 친구는 입을 열어 이야기도 해줍니다. 한 번은 두려움이 일 때,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더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할까봐 두렵다고 고백했습니다. 가만히 듣던 친구는 그게 왜 두렵냐고 물어왔습니다.
”왜라니, 당연하잖아. 더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좋으니까. 거기에 나의 가치가 달려 있어.“ 제가 답했습니다. 친구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1만 명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아주 좋은 일이지만, 단 한사람이라도 만족할 수 있다면 그 역시도 아주 좋은 일이라고. ”네가 부른 노래가 수 만명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다면 아주 좋은 일이야. 하지만 단 한 사람의 마음에 가 닿을수만 있어도 역시 좋은 일이지.“
맞는 말이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다시 내게 물어왔어요. 네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이지? 제가 답했습니다.
”내게 필요한 건 하나야. 내가 가치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 지금도 충분하다고. 설령 하다가 잘 안되더라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것.“
그러자 친구가 갑자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가며 이렇게 말해주더군요.
”넌 내가 아는 가장 멋진 녀석이야. 너만큼 골 때린 녀석도, 너만큼 웃긴 녀석도, 너만큼 대담한 녀석도 본 적이 없어. 넌 언제나 강했고, 언제나 잘해냈지. 난 니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삶을 살든 끝까지 응원할거야. 난 널 믿어.“
친구의 확신 찬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제야 제가 해야할 바를 할 수 있었죠, 이렇게 친구는 제가 곤경에 처할 때마나 나타나서 저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주고, 크게 응원해주었습니다. 좌절해있을 때 저를 일으킨 것도, 깊은 우울감에 빠져 시름시름 앓을 때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를 이해하는데도 가장 도움을 준 건 바로 이 친구였습니다. 친구는 엄청난 도움을 주면서도, 대가나 보답을 바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늘 그자리에 있을 뿐이죠. 제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도록.
내 인생에서 이 친구가 없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감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이 친구를 놓지 않을 작정입니다.
이쯤해서 여러분에게 제 친구의 존재를 알려주려고 합니다.
제가 모모라 부르는 저의 둘도 없는 친구는 바로, ‘글쓰기’입니다.
댓글
4 건
댓글 닫기
댓글 보기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4377 | 삶의 여정: 호빗과 함께 돌아본 한 해 [1] | 어니언 | 2024.12.26 | 337 |
4376 | [수요편지] 능력의 범위 | 불씨 | 2025.01.08 | 403 |
4375 | [수요편지] 삶과 죽음, 그 사이 [1] | 불씨 | 2025.02.19 | 407 |
4374 | [수요편지] 발심 [2] | 불씨 | 2024.12.18 | 431 |
4373 | 엄마, 자신, 균형 [1] | 어니언 | 2024.12.05 | 453 |
4372 | [목요편지] 별이 가득한 축복의 밤 [3] | 어니언 | 2024.12.19 | 503 |
4371 | [목요편지] 육아의 쓸모 [2] | 어니언 | 2024.10.24 | 564 |
4370 | [수요편지] 언성 히어로 | 불씨 | 2024.10.30 | 664 |
4369 | [목요편지] 두 개의 시선 [1] | 어니언 | 2024.09.05 | 675 |
4368 | [수요편지] 내려놓아야 할 것들 [1] | 불씨 | 2024.10.23 | 692 |
4367 | [내 삶의 단어장] 크리스마스 씰,을 살 수 있나요? [1] | 에움길~ | 2024.08.20 | 695 |
4366 | 가족이 된다는 것 | 어니언 | 2024.10.31 | 698 |
4365 | [수요편지] 타르 한 통에 들어간 꿀 한 숟가락 | 불씨 | 2024.09.11 | 705 |
4364 | [수요편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1] | 불씨 | 2024.08.28 | 709 |
4363 | 관계라는 불씨 [2] | 어니언 | 2024.12.12 | 715 |
4362 | [수요편지] 레거시의 이유, 뉴페이스의 이유 | 불씨 | 2024.10.02 | 716 |
4361 | [목요편지] 장막을 들춰보면 | 어니언 | 2024.08.22 | 729 |
4360 | [수요편지] 문제의 정의 [1] | 불씨 | 2024.08.21 | 736 |
4359 | 며느리 개구리도 행복한 명절 | 어니언 | 2024.09.12 | 744 |
4358 | [수요편지] 행복 = 고통의 결핍? | 불씨 | 2024.07.10 | 7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