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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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큰 조카를 데리고 인사동에 갔습니다. 아이는
인사동을 처음 와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검은 벽돌이 깔린 거리의 상점들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오르골을
파는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팔기도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음악을 고르면 새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수십 가지 유행가들 사이에서 조카가 고른
것은 마녀 배달부 키키에 나오는 ‘바다가 보이는 마을’입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곡이기도 합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는
1989년에 나온 지브리 애니메이션입니다. 작중 마녀들은
열세 살이 되면 독립해서 새로운 마을에 정착해야 합니다. 이것을 ‘수련’이라고 부릅니다.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 정착한 키키의 고군분투를 지브리식으로
풀어낸 아주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입니다.
그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숲속에 사는 화가 친구 우르슬라의 집에 방문하는 에피소드입니다. 키키는 어느 날 갑자기 마법의 힘을 잃어버립니다. 일을 해야 하는데 빗자루를 타고날 수도 없고, 단짝 고양이 지지의 말도 알아들을 수 없게 됩니다. 소위 ‘슬럼프’에 빠져버렸을 때 우연히 알게 된 소녀 화가 우르슬라네 집에 가게 됩니다. 숲속 작업실에서 우르슬라는 멋진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전나무 숲 위로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날개 달린 하얀 말과 황소가 날고 있고 주위에 까마귀들이 호위하듯이 함께 날고 있습니다. 천마의 말잔등에는 키키를 닮은 소녀의 옆얼굴이 환영처럼 어립니다.
마법을 쓸 수 없게 되어 조언을 구하는 키키에게 우르슬라는 자신도 그림이 갑자기 그려지지 않았던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전에는 생각하지 않아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데 돌연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상황과 너무 비슷해서 키키는 우르슬라에 게 어떻게 그 시기를 지나갔는지 물어봅니다. 우르슬라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고 그리다가 그래도 안 될 때는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고 합니다.
또 우르슬라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림이 갑자기 안 그려지고 정체되어 있다고 느꼈던 것은, 자신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누군가의 그림을 따라 했었다는 깨달음을 얻고, 자신만의 방식과 시선으로 나의 그림을 그리려 하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작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헤맬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요즘 저의 가장 큰 목표는 회사일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보고서의 형태이긴 하지만 제가 공부하고 분석한 것을 리포트 형식으로 보고하는 부서에 들어오게 되어 하루빨리 제대로 된 글을 쓰게 되고 싶은데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갑니다. 슬럼프라기 보다, 제 생각을 담고 방향이 있는 시각을 갖고 무언가 쓰기 위해서는 언제나 공부가 많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꾸 조급한 생각이 들 때마다 우르슬라의 그림을 떠올리며 꾸준히 해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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