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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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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6일 17시 57분 등록

, 나의 지리산아, 나는 지금 너에게 못 간다

 

2003년 여름, 지리산에 안긴 적이 있다. 구례에서 성삼재로 버스를 타고 올랐었다. 임걸령에서 텐트를 쳤고 선비샘에서 야영을 한 뒤 다시 장터목에서 하루를 잤으니 참 느긋한 걸음이었다. 그때는 터질 듯한 허벅지로 하루하루를 살았으니 만보漫步도 그런 만보가 없었다. 그해 지리산을 너무 깊이 흠향했던지 이후 꽤 오랫동안 다시 찾지 못했다. 지리를 잊은 사이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내 다리도 부러졌다. 사랑하는 사람(그해 여름, 지리산을 함께 올랐던)과 결혼을 했고 살던 집을 세번이나 옮기며 나를 닮은 아들과 딸 하나씩을 낳았다.

 

이듬해 나는 직장엘 들어갔고 밥벌이에 정신없는 사이 딱 10년이 훅하고 지났다. 겁나는 게 세월이요, 열린 문틈 사이로 고양이 지나는 찰나가 인생이라 했는가. 십년을 제쳐 두고 어제 걷다 만 그 길을 다시 이어 붙여 가는 듯 내 모가지에 선명한 주름과는 무관하게 지리산은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장터목에 취사장이 새로 생겼고 내리막엔 테크가 깔렸고 때가 되면 입산과 산행을 통제하는 것이 조금 생소했을 뿐이다. 이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생소함이니 그때나 지금이나 이노무 산은 얄밉게도 하나 변한 게 없다.

 

한때 지리산이 지겨운 적이 있었다. ‘97, 산을 만난 이후로 지리산을 매년 걸었고, 한달 내내 지리의 마루금을 잡고 놓지 않았던 적도 있었고, 어떤 때엔 일년에 서너 번도 오른 적이 있었으니 토끼봉 오르는 계단길이 지겨워 세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세 개의 도()가 점 하나로 합일된다는 삼도봉 삼각점도 대수롭지 않았고 연하천에만 가면 끊여 먹게 되는 라면 맛이 한 가지였다. 그땐 몰랐었다. 그 지겨움을 이리도 그리워할 줄. 나는 그때 그 마음을 먹어 제 스스로 간절할 때까지는 얼씬하지 말라는 벌을 지리산으로부터 받은 게다. 소중한 건 함부로 해선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리 마음조차 먹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10년이 지나 다시 찾은 2013년 중산리의 밤은 아름다웠다. 몰랐던 후배들과 여물통(커다란 등산용 코펠)에 라면 국물을 불어가며 마시는 사이, 잊었던 산가山歌를 희미한 기억으로 이어붙이며 불러재끼는 사이, 스펠에 찰랑이는 소주를 부딪히는 사이, 굴곡진 메트리스 사이에 고인 물을 닦아내는 사이, 결국 우리는 같은 '코펠밥 먹는 사이'임을 확인한다. 이제사 나는 안다. 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소한 일들은 그 어느 순간도 놓칠 수 없는 산이 주는 소중한 선물임을.

 

그러나, 백무동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그 긴 길과 중산리 내려서는 미친 내리막길을 하루만에 걷는 일은 만만하지 않다. 2016, 다시 3년 만에 찾은 지리산은 한 때 자신을 홀대한 만큼 나를 쉽게 용서하긴 싫었던 모양이다. 근데 아픈 허벅지가 왜 그리 기분 좋았는가. 허벅지를 잡고 다리를 절며 내 다시 오마 하며 헤어졌던 그 길이 마지막이었다.

 

2021, 오래 전 지리산을 코로나가 창궐하는 호치민에서 다시 열었더니 눈이 저절로 감기고, 눈을 감으니 오히려 선명해지는 그곳을 손으로 잡으려다 허망하게 허공만 잡고는 아, 나의 지리산아! 느낌을 전달하지 못하는 느낌표가 야속하다. 나는 지금 너에게 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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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7 09:34:07 *.52.254.45

^^  사랑 !

그 사랑  에리히 프롬이 말하던 그런...


"존중이며 보호이고 책임인 동시에 알려고 노력해서 얻는 지식과 같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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