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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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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3일 22시 58분 등록

쓸모없음의 쓸모

 

"그릇은 진흙으로 만들지만, 쓰이는 것은 그릇 속에 담긴 비움이다."

 

노자의 <도덕경> 나오는 말입니다. 그릇은 속이 비어 있어 그 쓰임새가 명확치 않습니다. 용도가 달리 정해진 것도 아니어서, 물을 담으면 물그릇, 밥을 담으면 밥그릇, 반찬을 담으면 반찬그릇이이 되죠. 노자는 이를 두고 쓸모없는 것의 쓸모(無用之用)를 말했습니다. “무용취시유용無用就是有用, 대무용취시대유작위大無用就是大有作爲” 즉 쓸모 없는 것이 곧 쓸모 있는 것이 되고, 쓸모가 없을수록 더 큰 용도로 쓰이게 된다는 겁니다. 노자는 '무용의 유용함'을 설파함으로써 '만물이 유용하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과연 '유용하다, 쓸모있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현대 사회에서는 명확한 기능을 가진 인간을 유용한 인재로 대접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의사, 판사, 엔지니어처럼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개개인에게 명확한 기능을 부여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있지요. 따라서 현대에 쓸모있는 인간이란, 어떤 기능을 가졌고, 그 기능이 얼마나 명확한지에 달려있습니다. 쓸모를 가지기 위해 개인은 스스로를 특정 기능으로 채우고 그를 끝없이 단련해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일까요? 특정 기능을 가지는 것만이 유용한 것일까요? 가만히 보면, 정말 쓸모있는 것들은 비어있거나 기능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한번 예를 들어보죠. 우리가 피부처럼 쓰고 있는 스마트폰. 스마트폰은 '쓸모를 위해 비어있는 도구'입니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앱을 설치하고,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노트를 기록하는 등 자신에게 맞게끔  활용합니다. 속이 텅 비어있는 대나무 역시 예부터 활용도가 컸습니다. 바구니, 식기로 사용되고,  항균효과가 있어서 술이나 약을 넣어 보관하기도 했죠. 또 악기로도 많이 쓰였는데, 빈 공간을  활용해 멋진 음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숫자 0도  빼놓을 없습니다. 0은 아무것도 없음을 나타내는 수로, 0의 발견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인류는 0을 통해 음수가 존재한다는 걸 발견했고, 어떤 큰 숫자도 0 활용해 아주 간단하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되면서 문명 발달의기초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0과 1로 이루어진 수를 연산하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0이 없었다면 아예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0이 없었다면 블랙홀의 존재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건축물을 지탱하는 최대 무게도, 비행기의 가속도도 알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평생 숫자 '0'에 사로잡혔던 세계적인 수학자 아미르 D 악젤은 0을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0이란 '아무것도 아니면서 엄청난 무언가를 대표하는 것, 무한이면서 동시에 비어있는 것이다." 

 

 

쓸모를 아직 찾지 못했을 뿐

 

역설적으로 비어있다는 것, 기능이 특정되지 않았다는 큰 쓸모를 낳습니다. 그릇이 비어있기 때문에 밥을 담을 수 있고, 방이 비어있기 때문에 기거할 수 있습니다. 비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황에 따라 쓸모를 채워 넣을 수가 있습니다. 소설가 김연수는 무용無用함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오로지 무용無用하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하루 중 얼마간을 그런 시간으로 할애하면 내 인생은 약간 고귀해진다.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용無用한 사람이 된다. 시를 읽는 일의 쓸모를 찾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런 목적없이 날마다 시를 찾아서 읽으며 날마다 우리는 무용無用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데도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순수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세상 만물은 저마다의 쓰임이 있고, 이는  존재의 이유로 연결됩니다. 유학에서는 아예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하여 '모든 것은 나면서부터 천명을 받는다'는 걸 전제로 하지요. 쓸모가 있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존재한다는 자체가 쓸모가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쓸모없다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됩니다. 쓸모가 없다는 쓰임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더 이상 그 쓸모를 찾지 못했다는 말일 뿐이니까요.  

 

남들 눈에는 쓰레기여도 어떤 이들의 눈에는 보물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버려지는 폐현수막을 모아 가방을 만드는가하면, 고철로 모아 악기를 만들어 그걸로 세계를 다니며 연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쓰레기로 예술품을 만들어 파는 예술가도 있고, 자투리 천을 모아 옷을 만들어 파는 기업도 있습니다. 이들은 남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쓸모'를 찾아 새로운 쓸모를 만들어내는 눈을 가진 이들입니다.  비어있는 것들, 기능이 특정되지 않은 것들은 우리의 창조력을 엄청나게 자극합니다. 그 쓸모를, 새롭게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혹시 주변에 쓸모없다고 방치되어 있는 것들이 있으신가요, 너무 하찮아서 쳐다보지도 않았던  내 능력은요?그들 중에 새로운 쓸모를 찾아낼 것들도 있지 않으신가요?   

IP *.181.10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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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5 07:00:35 *.169.176.7

無爲而無不爲 =>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공격적인움직임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반응이다. 즉 유효한 반응을 위해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유보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보고 있는 것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보고 있는 것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생각과 의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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