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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7일 02시 07분 등록


제도

 

                            김승희

 

아이는 하루 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깔이 나갈까 봐 두려워한다.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

금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

 

엄마, 엄마,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되지? 그렇지?

아이의 상냥한 눈동자엔 겁이 흐른다.

온순하고 우아한 나의 아이는

책머리의 지시대로 종일 금 안에서만 칠한다.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 이렇게, 말해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꽃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나 그토록 제도를 증오했건만

엄마는 제도다.

나를 묶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내가 그 여자이고 총독부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김승희 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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