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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8일 21시 40분 등록



술에 취한 목소리, 취해가는 목소리가 파도타기를 하듯 이쪽에서 저쪽으로 왁자지껄 번져나간다. 일부는 이미 술이 많이 올라있고 일부는 이정도 쯤이야 하는 듯 멀쩡한 모습이다. 담배연기가 솟아오르고 한쪽에서는 웃음소리가 한쪽에서는 흥분된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회식을 마치고 자리를 옮긴 술집. 그리 넓지 않은 30여명이 자리를 차지하자 절반의 공간이 사라졌다. 하루의 일을 마친 직장인들은 회식과 2차 술자리라는, 일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는 업무를 하고 있다.

30여명이 앉아있는 테이블 사이를 종업원 한사람이 분주하게 오간다. 종업원은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다. 아마 40대 중반을 바라보지 않을까 싶은 나이다. 이런 곳에서 일해 본 경험이 없는지 일이 서툴다. 폭탄주를 만들어야 하니까 잔을 달라는 말에 맥주잔 30개를 가져다 나르기 바쁘다. 테이블마다 잔을 내려놓는 종업원에게 한사람이 잔을 모두 치우고 네 개만 달라고 말한다. 종업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잔을 달라고 하더니 다시 치우라니 말이다. 어쨌거나 이번에는 잔을 치우기 바쁘다. 잔을 다 걷어가고 난 뒤에 500cc 맥주잔 네 개를 가져온다. 테이블 위에 500cc 잔 네 개를 내려놓자마자 누군가 다시 잔을 가져가라고 한다. 그냥 맥주잔 주세요. 어디선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다시 맥주잔을 가져 왔지만 이번에는 폭탄주를 만드는데 필요한 소주잔이 빠졌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끝에 술자리는 시작됐다. 안주를 테이블마다 가져다 놓은 종업원은 계산대 옆의 조그만 의자에 몸을 앉히고 멀거니 밖을 바라보고 있다. 나이로 보아서나 일하는 거로 보아서나 이런 술집에서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 보인다.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의 생김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얼굴 생김도 술집에서 일하기는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늦은 밤 그녀가 술집에서 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늦은 밤 그녀를 술집에서 일하게 내 몬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흔히들 말하는 아이들 학원비 때문일까. 남편이 실직이라도 한 걸까.

40대 여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그 일이라는 게 단순 노동에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비정규직이며 임금도 형편없지만 그래도 40대 여자들은, 아줌마라고 불리는 여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아줌마들이 일자리를 찾아 헤매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아줌마들이 찾아 나서는 일자리에는 교과서에 나오는 자아실현이나 사회적 경력 쌓기, 내 꿈 찾기 등의 그럴듯한 이유는 별로 없다. 눈앞의 현실이 그녀들을 일자리라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 푼이라도 벌 수 있는 자리로 내 모는 것이다.

그녀들이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대표적인 게 학원비다. 아이들에게 학원이라는 과정은 이제 학교라는 공교육보다 더 중요해졌다. 학교는 대충 다녀도 학원은 성실히 다녀야 하는 시대다. 학원에 가지 않으면 대학에 가기 힘들고, 학원에 가지 않으면 친구도 만나기 힘들다. 대학에 가지 못한다는 말은 한국사회에서 힘들게 살아야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진짜로 그러할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대학진학은 아이들의 생애 전체를 놓고 벌이는 전쟁과 같다. 그러한 까닭에 학원이라는 과정에 소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홀하기는 언감생심이고 학교 공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 학원비라는 게 만만치 않은 액수다. 중고등학교 수업료를 넘어 선지는 이미 오래고 대학교 등록금보다도 비싸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애들 학원 보내기도 힘들다. 그러면 방법이 뭘까. 아내들이 나서는 것이다. 아줌마들은 그래서 일을 찾아 나선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잡히는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술집 사장의 말에 의하면 술잔도 구별하지 못하는 나이 든 종업원의 경우는 실직한 남편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아마 40대 중반이나 40대 후반쯤 이리라. 그 나이의 남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리에서 언제 떠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한다. 마음의 준비를 조금씩 하고 언제가 다가올 그 시점을 대비하기 위해서 다른 일을 찾아보기도 한다. 40대의 남자들은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지만, 조직과 사회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직과 사회는 그들이 일을 하게 하지도 않고 말을 하게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다만 지켜보고 다만 때가 되면 내보낼 뿐이다. 40대들이 지니고 있는 전문성과 숙련됨, 심성에 쌓아올린 다양한 경험에 대해서 전혀 부가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단지 나이만이 사람을 재는 척도이고, 인건비가 조직을 운영하는 최대의 요건이 될 뿐이다. 그 요건에 맞지 않는다면 그 이상도 이하도 살펴보지 않는다. 그들이 자기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낸 직장을 나서면서 생기는 파급효과도 조직에게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의 가족과 그렇게 늘어나는 실직자들이 쌓여가는 사회적 파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효용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만 따질 뿐이다. 그 결과로 술잔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그녀는 지금 이 시간에 술집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일그러진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일그러진 초상화의 하나다.

테이블에서는 취기 속에 술잔이 정신없이 돌아간다. 당연하다는 듯 폭탄주다. 폭탄주의 특징은 호혜평등이다. 누구나 마셔야 하고 누구나 거의 같은 비율로 마셔야 한다. 술을 잘하고 못하고의 개인 차이는 별로 인정되지 않는다. 순서가 되면 마셔야 한다. 술 못하는 사람에게는 가끔 핸디캡이 적용되기도 하지만 질펀한 술자리에서 큰 기대를 하기는 힘들다. 살아가는 많은 곳에서의 평등이란 말은 참 좋을 터인데, 실제 그런 곳에는 평등이 없고 술자리에서는 원칙처럼 평등이 지켜진다. 묘한 아이러니다. 조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위계질서와 업무의 불평등을 당연시 하는 사람들도 술자리에서는 평등주의자가 된다. 어렵고 힘든 일은 네가 하고 쉽고 좋아하는 좋은 일은 내가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술자리에서는 왜 자신이 좋아하는 술 마시는 일을 꼭 남들과 나누어 가지려 하는지 모를 일이다.

피곤한 몸과 마음을 한쪽 구석에 보이지 않게 내려놓은 사람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술을 호기 있게 들이킨다. 술은 넉 잔이 짝을 이뤄 한꺼번에 돌아다닌다. 마치 융단폭격처럼 테이블 위에 술잔이 놓인다. 자신의 차례가 된 사람들은 싫든 좋든 술잔을 하나씩 들고 일어선다. 술이 좋아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사람도 있고 술에 자신이 없어 얼굴이 굳은 사람도 있다. 얼굴이 굳은 사람에게는 이곳저곳서 지청구가 더해진다. 심한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어쨌거나 차례가 되었으니 마셔야 한다. 술을 시원하게 들이 키고 나면 순서처럼 박수소리가 이어진다. 중간에 마시기를 멈추거나 다 마시지 못하는 사람에겐 장난처럼 야유가 이어진다. 억지로라도 다 마시게 술잔을 받쳐주기도 한다. 원하지 않는 배려가 술자리에서는 쏟아진다. 왜 평소에는 그런 배려를 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이상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배려다.

술자리에서는 많은 생각과 시선이 오간다. 앉는 자리에서부터 그렇다. 일부는 몸을 바쳐 술을 마시기도 한다. 술은 기회의 통로이고 술자리는 그런 통로를 탄탄하게 굳혀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호(好) 불호(不好)와 필요에 따라 앉은 자리가 수시로 변한다. 자리의 배치와 움직임이 삼국지에서 군대의 진영 배치를 보는 듯 하다. 술을 즐기지 않고 영향력이 없는 사람은 점점 주변부로 밀리고 술을 즐기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 주위는 서서히 붐벼간다. 중심부위에서는 연신 술잔이 돌아가고 목소리도 높아진다.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이 없는 주변부에서는 조용히 홀짝홀짝 술잔을 기울인다. ‘우체국장 살인사건’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생길만도 하다. 사회의 역학구도 자체가 그런 것이다.

당연한 듯하지만 술자리에서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스타 아닌 스타가 되고,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분위기 망치는 바이러스가 된다. 한편에서는 평소에 술자리를 즐기지 않는 사람을 위해 특별한 술잔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알코올 함량을 최대한도로 높인 폭탄주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벌주의 형식을 갖춘 술잔이 건네진다. 술을 잘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한 두 잔이면 인사불성이 된다. 이곳저곳서 환호성이 오른다.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달성했는지 모르지만 무엇인가 해냈다는 뉘앙스의 환호성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술 구덩이 속으로 쓰러져 간다. 탁자위에 쓰러지기도 하고, 의자위에 눕기도 하고, 길거리를 헤매다 지나가는 택시를 간신히 부여잡고 택시의 시트위에 쓰러지기도 한다. 그렇게 힘든 하루가 끝난다.

박노자는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한국사회의 폭력성에 대해서 신랄하게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폭력성이란 한국에서 살아 온 사람들에게는 폭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 많다. 그러한 것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사람에게는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고 물리적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더욱 무섭다. 개개인의 마음속에 그리고 사회의 구조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사회적 폭력의 파장은 넓고도 크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것이 폭력인지는 모르고 있다. 그 구조 속에서 긴 세월을 살아왔기에 숨쉬는 공기처럼 당연한 모습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한밤중에 술집에서 일을 해야 하는 나이 든 종업원과 억지로라도 술을 넘겨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가해진 것은 전체주의에 토대를 둔 사회적 폭력의 결과다.
조직은 조직이라는 큰 틀의 논리만을 지키기 위해 개인이라는 사회의 구성원을 팽개쳤다. 팽개쳐진 사람에게는 가족이 있었지만 조직 속의 아무도 그것을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그녀의 아내는 어디에선가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라도 일을 해야만 했다. 주량에 넘치는 술을 아무런 즐거움도 없이 마셔야 하는 자리에도 사회적 폭력은 난무한다. 그곳에는 화합을 위하여 개인이 희생되어야 하는 논리가 지배한다. 그것이 효과적인 화합의 방법인지 아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그 방법을 따를 뿐이다. 위계라는 사회적 서열과 조직의 질서라는 권력의 힘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생존이라는 명제에 항상 매달려 있는 직장인에게 그러한 도구는 언제 어디서든 효과적이다. 퇴근이후라는, 직장의 논리로 빼앗을 수 없는 개인의 시간이라는 부분은 무시된다. 그 속에는 약자는 힘으로 짓밟아도 된다는 천박한 논리가 숨어있다. 권력에의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것도 역시 그 속에 숨어있는 하나의 모습이다.

민주화, 인권, 인간의 존엄성, 자유와 평등 등의 말은 어느 곳에서나 쉽게 들을 수 있다. 정부에는 인권위원회라는 조직까지 있고, 죄를 짓고 경찰서에 끌려온 범죄자도 인권을 들먹인다. 인권과 존엄이 흔할 정도로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인권과 존엄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인권과 존엄이라는 존재를 모르고 산다. 인권과 존엄은 커녕 보이지 않는 폭력에 얽매여 산다. 그 폭력은 윗세대에서 내려와 현세대를 옭아매고 다음세대로 넘어간다. 누구도 폭력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폭력은 그래서 더 뿌리가 깊고 캐내기 어려운 잔재로 남는다. 개인의 삶에서는 개성을 내세우면서 조직 속의 삶에서는 전체주의를 한마디 거부의 말도 없이 따르는 양면성. 그것이 한국인의 모습이고 인권과 폭력의 공존은 한국사회의 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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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9.09 07:37:35 *.244.220.254

'천민자본주의'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이상한 대한민국의 전초전인가요? 비평의 눈이 좋습니다 ^^ 
저도 전체주의 문화를 퍼트린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네요 그나저나 어제 먹은 술이 안깬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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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9.09 15:55:52 *.97.37.242

요즘도 이런 술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나?
있기야 하겠지만, 그 자리가 마땅치 않으면 나오면 그만 아닌가? 그게 잘 안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드네.  요즘은 술 안먹고도 얼마든지 사회생활 잘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는 데...
특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별로 동의하지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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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9.10 23:45:44 *.36.210.123

술도 안 좋아하는 사람의 글이 술술 나오네. 홀짝 거리지도 않고 말이야. 단숨에 꿀꺽 폭탄주처럼 마구 쏟아지는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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