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조회 수 3416
  • 댓글 수 6
  • 추천 수 0
2008년 9월 15일 20시 57분 등록


창밖으로 보이는 도심의 거리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다. 어둠처럼 검은색의 식탁 위에는 소주잔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몇 개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많다. 비틀거리며 앉아있는 소주잔에는 달빛처럼 맑은 색깔의 소주가 쏟아져 내리고 접시에 누워있는 머리고기와 순대는 식탁 위를 떠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한 남자가 말한다. 간단히 돈을 만드는 방법이 있어. 비법을 가르쳐 줄까. 음, 뭐냐 하면 말이지 처가에 마누라를 보내는 거야. 처가에 마누라를 몇 번 보내서 울게 하는 거야. 절대 돈 이야기는 하면 안돼. 몇 번 그렇게 한 다음에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거야. 빌려만 오면 일은 끝난 거지. 무이자는 당연하고 안 갚아도 돼는 돈이지.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남자가 말한다. 뭘 그렇게 어렵게 하나. 처음부터 그냥 달라고 하지. 그게 더 간단하잖아.
한쪽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이번에 큰 집으로 이사 간다면서 돈은 어떻게 마련했어? 엄마한테 가서 매달렸지. 집에서 해주든? 중도금 못내 계약금 떼이게 생겼다고 징징댔지. 옛날에 집 살때도 그렇게 했는데 뭐.
머리고기가 아닌 돼지머리를 가져다 놓았더라면 돼지머리가 웃다가 하품 할만한 이야기가 식탁 위를 떠돈다. 남자들의 이야기는 쉬지 않고 이어진다. 자랑인지 비법인지 힘 안들이고 돈버는 이야기다. 불혹이라는 나이를 넘어선 남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나이와 존재와 역할의 의미는 스스로 버리고 오직 하나의 목적만 보여준다. 그러한 의미를 알아야 할 필요가 없어서 아예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는지, 자신들이 스스로 짓밟았는지 모르지만 뚜렷한 목적의 추구에 많은 것이 묻혀지고 버려진다. 그래서 그게 무슨 대수냐고 말한다면 누구도 할말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가져다주니까.
하긴 술잔을 앞에 놓고 떠드는 그들만 그럴까. 얼마 전 국가적인 사고가 터졌을 때에도 사람들의 관심은 유가족이 얼마의 보상을 받았느냐에 쏠렸다. 추측과 분석이 오가는 것은 사고를 당한 사람이나 유가족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받은 돈이 부러운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의 끝에는 꼭 듣지 않으면 좋을 이야기가 따라 나온다. 남은 누구는 좋겠다느니. 땡잡았다느니 인생 폈느니 하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다.

원시시대의 남자들은 사냥으로 가족과 부족을 부양했다. 그들에게는 사냥한 동물의 숫자와 크기가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시대가 진화를 거듭하면서 남자들은 밭과 논의 크기, 높은 벼슬, 학문 등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추구했다. 현대의 남자들은 벌어오는 돈의 크기가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 중의 하나이다. 사냥한 동물과 논 그리고 벼슬 등은 사회적 지위와 돈으로 치환됐다. 그래서 그들은 돈이라는 목적물에 집중한다.
역사라는 긴 시간을 살펴보면 남자들로서는 요즘처럼 살기 편한 시대가 없다. 어느 시점을 보던지 근대가 시작되기 전에는 여자가 가족 부양의 의무를 진 적이 없었다. 물론 도움이나 보조의 역할은 했지만 여자의 주된 임무는 아니었다. 일부의 특수한 경우에는 여자가 가족을 부양했지만 그것은 어차피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가족을 빌어먹게 만든 남자든 망나니 같은 남자든 처자식의 생계라는 짐은 오롯이 남자의 어깨에 모두 놓여있었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모든 시대가 그러했다.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현대로 와보자. 맞벌이는 이제 대세를 넘어 거의 의무화하는 분위기다. 젊은 사람들의 결혼조건에는 맞벌이가 필수조건으로 들어가 있다. 나이가 든 사람들도 맞벌이를 원하기는 마찬가지다. 여자들도 순순히 받아들인다. 시대의 강압에 떠밀렸는지, 자아실현의 욕구 때문인지, 배운 게 아까워서인지, 남자의 압박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현대의 여자들은 대부분 일을 찾아 나선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여자도 일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맞벌이냐 아니냐에 따라 수입은 격차가 커 지고 그 차이는 당연하게 고스란히 생활수준으로 이어진다. 적정한 수준에서 여자와 남자는 합의를 본다. 안락한 삶을 위한 합의이고 협업이다.

어느 시대에도 여자에게 가족부양의 의무를 지운적은 없다. 여자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내 몰은 적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경제와 문명이 발전한 현대는 당연한 듯 그러한 요구를 한다. 그에 부응하지 못하는 여자에게는 무능력이나 무책임의 딱지를 붙인다. 현대판 주홍글씨다.
여자들이 생활전선에 나서는 만큼 남자들은 그만큼 짐을 덜어냈다. 자신이 일을 안 하면 가족이 굶어야 하는 굴레 같은 압박감에서도 벗어났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혁명 같은 일이다. 커다란 삶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 자신이 벌어오는 것보다 더 상위의 생활을 누릴 수도 있게 되었다. 숨어서 웃던 남자들은 이제 내놓고 크게 웃는다. 말 그대로 땡잡은 것이고 팔자가 펴진 셈이다.
요즘은 남자 전업주부(主夫)도 있다. 완전히 역할을 바꾸어 남자가 살림을 한다. 주부의 역할이 쉽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남자가 짐을 덜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말이다. 남자가 남자 구실을 못한다는 비웃음이나 손가락질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그만큼 개념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남자들의 짐은 많이 가벼워졌다. 여러모로 남는 장사고 그 수지타산은 시대가 가져다주었다.

남자들은 이제 칼이나 창을 들고 사냥을 나가지 않는다. 삽과 괭이를 메고 들로 나가지도 않는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조작하며 고기와 쌀을 벌어들인다. 사무실이라는 공간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저항력을 만들 필요도 없다. 힘조차 키울 필요가 없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마우스를 조작할 정도의 힘이면 생존이 가능하다.
그래서인가. 남자들은 이제 머리만 기형적으로 발달해 가는 것 같다. 목적은 정해졌고 짐은 많이 가벼워졌다. 남은 일은 머리만 굴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쉽고 편하게 많은 것을 벌어들일 것인가. 전략적 고민만 하면 된다. 그러한 고민 속에 존재와 역할이라는 의미는 빛을 잃어간다. 적지 않은 남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포기하더라도 더 편하고 더 손쉬운 길을 원한다. 일부에 불과하겠지만 그래서 불혹이 넘은 남자들의 입에서 마누라를 처가에 보내서 울게 하라는 둥, 돈이 모자라면 엄마에게 징징대라는 둥의 말이 어렵지 않게 나온다. 거기에 더해 그게 부럽다는 주변의 말도 기가 막히기는 마찬가지다.

호기 있게 남은 술을 들이켜고 나선다. 이제 남자들이 호기를 부릴 곳은 술잔 앞 뿐인가?  거리는 어둠 속에 불빛만 가득하다. 인도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거리의 차에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저 속의 절반인 남자들은 어떤 존재의 의미가 있을까. 술잔 흐트러진 식탁 위에서 아직도 웃고 있을 돼지머리가 혹시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까. 차라리 잘라버려라. 남자들아.


 

IP *.163.65.243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9.15 21:26:58 *.36.210.60

나도 돼지머리와 이심전심. 잘르라고 말하는 그대가 꼬장꼬장 살아있어서 참 좋다. 제발 오래오래오래 살아 남으라.

프로필 이미지
부지깽이
2008.09.15 21:39:16 *.160.33.149

 재미있다..  빨리 읽힌다.
그리고 전염력을 가지고 있다.   그 썩을 놈들 하고 분개하게하는 힘이 있다.
써 보면서 방향을 잡아 보아라.   책은 스스로 갈 길을 알고 있다.  시작하면 제 갈길로 간다. 
그러니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프로필 이미지
차칸양
2008.09.16 15:39:46 *.122.143.151

잘라버리라고 말하는 돼지머리는 숫놈인감, 암놈인감?

웃으면서 말하는 걸까, 비장한 톤으로 말하고 있을까.

복수의 감정(자신의 목을 자른)일까, 순수한 분노의 토로일까!

이 글을 읽고 내 아래를 빤히 쳐다보게 되는 이 상황은 코미디일까, 정극일까...

아, 어렵다.........

프로필 이미지
2008.09.17 00:00:34 *.71.235.3
  
    나날이 재미있어지는 창오라버님의 글. 추석은 잘 지냈는지요.
프로필 이미지
현웅
2008.09.17 06:25:59 *.37.24.93
형 한잔해요. 광화문으로 몇 시 쯤 가면 되우.....
프로필 이미지
정산
2008.09.17 15:41:29 *.97.37.242
지난 번 보충 수업때 못나가서 창의 첫책 주제를 잘 모르겠는데,
요즘 쓰는 칼럼을 보니 대충 감이 오는 듯도 하네. 찌들고 답답하고 힘들고 왜로운 중년의 모습. 맞는가?

근데, 간단하게 돈 버는 방법. 그건 누구한테 들었수? 정말 그렇게만 하면 돈이 되나? 
은근히 구미가 당기는... ㅎㅎㅎ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