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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15일 23시 46분 등록
 

CEO 안철수가 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을 읽었다. 2004년에 발간됐으니, 그의 나이 40대 초반에 출간한 책이다.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가 보는 안철수는 원칙주의자다. 꼬장꼬장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면이 많다. 매사에 빈틈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빈틈이 보이지 않아서 인지 인간적인 매력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책을 몇 권 읽고 나서 그를 좋아하게 됐다. 그가 자신의 가치관으로 이야기하는 ‘정직’, ‘성실’,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세’를 실천하는 일관된 모습을 그의 책을 통해 또 언론에 비치는 그의 삶을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칼럼의 제목은 그의 책에서 나오는 소 챕터 제목이다. 그가 말하는 ‘원칙’에 대한 소신은 이런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회사 차원에서 보면 ‘핵심 가치’가 바로 지켜가야 할 원칙이다..... 만약 회사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는데 회사의 핵심 가치를 어기면 살아날 수 있는 비즈니스 기회가 있다고 하자. 이때 회사를 존속시키기 위해 핵심 가치를 거슬러야 할까? 차라리 회사가 스스로 소멸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스스로 설정한 핵심 가치를 지키지 않았다면, 설령 그 회사가 생명을 이어가더라도 생존할 존재 이유 자체는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30p]


몇 일 전 여당의 한 국회의원이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10년 이상이고 55세 미만인 가입자가 소득이 없을 경우 반환일시금을 지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최소 연령인 55세 이전에 실직 등으로 자격을 상실한 경우 그동안 낸 연금보험료를 반환일시금으로 돌려 줘서 생활안정자금이나 경제적 재기밑천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다.

지금 실직 중이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솔깃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노후 타령이냐.’ ‘우선 먹고 살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다. 이처럼 절박한 얘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추석 연휴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이런 내용을 언론에 배포한 걸 보면 배포 시기 또한 적절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가족들이 모인 추석 제사상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할 것이다.

시민단체와 야당 국회의원들은 강력하게 반대의 뜻을 밝히고 나섰다. 참여연대는 “국민연금 반환일시금 제도 부활은 강제저축을 통한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국민연금 본래 목적에 위배되며 이는 가입자들의 국민연금 이탈을 촉진시켜 국민연금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장년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대책이 일회성 소비로 그칠 반환일시금 지급인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반환일시금 확대 정책은 ‘곶감 빼먹기 정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야당의 한 의원은 “반환일시금 확대는 경기가 어려운 서민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 국민의 노후소득 보장 기반을 근간부터 흔드는 단기 처방식 포퓰리즘 국정운영의 전형”이라고 비판했다. 한국노총에서는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체감하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과 빈곤문제는 국민연금이 아니라 국가의 경제, 고용, 빈곤대책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 법안은 경제적 도탄에 빠진 국민들을 국가의 책임으로 구제하기 보다는 '아랫돌 빼어 윗돌 괴는' 식의 근시안적 정책”이라고 비난했다.

이 법안을 제출한 국회의원은 오랫동안 국회 보건복지상임위원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1998년 반환일시금 지급 기준이 대폭 축소된 배경, 또 2004년에는 반환일시금 지급을 제한하는 현행 제도가 위헌이 아니라는 헌재의 판단이 내려진 배경도 잘 알고 있을 사람이다. 그가 발의한 법안대로 된다면 국민연금은 ‘10년 만기 정기적금 제도’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노후소득보장 제도로서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워 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을 법한 국회의원이 이런 법안을 발의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요즈음도 반환일시금을 받으려고 국민연금공단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이 사람들은 공단에 와서 자기가 낸 돈을 돌려 달라고 떼를 쓴다. 협박을 한다. 자살 소동을 벌이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정을 들어보면 정말 딱하기 그지없다. 별의 별 어려운 사연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달래고 이해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법만 아니라면 정말 그들에게 돈을 내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는 없다. 법이라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98년도 IMF 상황 하에서 자신이 냈던 국민연금을 담보로 80% 수준까지 생계자금을 대출해주는 제도를 한시적으로 시행한 적이 있었다. 7개월 동안 24만 여명이 8천억 원의 대출을 받아갔고, 대출 회수율은 10퍼센트 남짓이었다. 22만 여명이 대출금을 갚지 않고 그들이 납부한 보험료로 상계처리 했다. 그들이 상계처리 한 돈은 22만 명이 평균 7년 동안 가입한 기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들이 연금을 받을 수 있는 7년 치에 해당하는 권리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22만 명 중 그 돈으로 재기에 성공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22만 명 중에서 노후에 국민연금을 받지 못하게 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올해로 국민연금이 시작된 지 20년째다. 연금을 낼 때는 내라고 하니까 별 생각 없이 냈고 이런 저런 문제 제기를 했던 사람들도 대개 연금을 받게 되면 매월 꼬박꼬박 자신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연금에 대해서 든든함을 느낀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많다. 자신이 납부한 연금으로 받는 돈이니 자식들이 주는 용돈과는 그 뿌듯한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말도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참고 인내하며 연금을 납부했던 보람 같은 걸 느끼게 되는 모양이다.


국민연금의 첫 번째 원칙은 ‘국민의 노후소득 보장’이다. 여당 국회의원은 이 원칙을 깨자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 사람의 원칙은 그럼 무엇일까? 지금 당장 경제상황이 무척 어렵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서 ‘국민의 노후소득 보장’ 원칙 정도는 깨도 된다는 발상인 것 같다. 지금 당장 어려운 상황의 타개가 이 국회의원의 원칙인 것 같다. 이런 발상이라면 환경정책도 깨도 되는 것인가? 지금 당장의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중장기적으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원칙들을 깨도 된다는 논리인가?



국민연금에는 현재 230조라는 많은 기금이 적립되어 있다. 앞으로도 이 기금을 활용해서 당장의 어려운 난국을 타개해보고자 하는 정치적인 담론들이 많이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이 하나있다. ‘국민의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원칙을 회손해서는 안 된다는 뻔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버리고 원칙에 충실하면 당장은 손해인 듯 보이지만 결국 그것이 옳은 결정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켜나간다면 언젠가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CEO 안철수의 이야기도 기억해볼 만한 말이다.

IP *.5.98.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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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7 00:07:38 *.71.235.3
국민연금 안내다가 몇년전 부터 소속된, 옆지기가 내고 있는 국민 연금,  오라버니 글 읽노라니 얼마나 되나 슬그머니 계산 중. 추석 잘쉬셨사와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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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8.09.17 08:35:07 *.37.24.93
형님의 원칙과 소신이 묻어나네요. 안철수 제가 존경하는 분이라 더 관심이 가요. [영혼이 있는 승부]에 나오는 글입니다.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면 시작이다

나는 우주에 절대적인 존재가 있든 없든,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세에 대한 믿음만으로 현실과 치열하게 만나지 않는 것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또 영혼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살아있는 동안에 쾌락에 탐닉하는 것도 너무나 허무한 노릇이다. 다만 언젠가는 같이 없어질 동시대 사람들과 좀 더 의미 있고 건강한 가치를 지켜가면서 살아가다가 ‘별 너머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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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칸양
2008.09.17 10:07:29 *.122.143.151
오홋.. Charles Ahn(안철수) 행님의 좋은 글과 더불어 국민연금에 대해 이야기하니 훨씬 교양미와 더불어 격조가 높아지는 느낌인데요!

원칙을 지켜가는 국민연금... 좋습니다..
더불어 정산행님의 글도 나날이 쎄끈틱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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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9.17 10:08:34 *.244.220.254
얼마전 부터 연구원 커리큘럼과 칼럼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어 나가는 느낌이 좋습니다. ^^
이제 쭉~ 가시는 군요. 국민연금, 한길로~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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