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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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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19일 10시 50분 등록
 

안타까운 순간


  승진이가 영어공부에 재미를 붙인 일은 정말 의외였다. 누구도 승진이가 공부에 취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꼭 승진이가 중학교 때 좀 놀았던 아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침조회를 하러 들어온 담임선생님이 승진이 옆을 지나쳤다. 그날따라 뒷문으로 들어왔다. 순간 뭔가를 느꼈는지 멈칫하고는 교탁위로 올랐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출석을 부르고 금방 내려왔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아까 멈칫한 자리로 선생님이 다시 돌아간 것이다. 반 아이들 중에 담배를 1학년 때부터 피운 애들은 몇 명 없었는데 거기에 승진이가 끼어있었다. 담임 이경수 선생님의 코는 예리했다.


  선생님은 승진이 옆에서 멈춰 섰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가방 열어봐”


  평소에도 가방 검사는 수시로 있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이 검사한 경우는 없었다. 센터까기(가방검사)는 별명이 ‘인민군’인 학생주임 이민국 선생님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승진이의 중학교 때 전적을 알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날카로운 인상 때문인지 그 아인 늘 표적이 되곤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승진이 가방에서 담배, 칼, 체인, 본드 등 ‘인민군’이 찾는 물건이 나온 적은 없었다.

  승진이 얼굴색이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은 더욱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다그쳤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낮게 깔렸다.

  “열어!”

  지퍼를 여는 승진이 손이 조금씩 떨렸고 얼굴은 점점 더 굳어져갔다. 지퍼가 가방 끝으로 옮겨지려는 순간 담임선생님은 승진이를 자리에서 나오게 하고는 가방 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은 확실히 ‘인민군’과는 달랐다. ‘인민군’이었으면 벌써 가방을 송두리째 위로 들어 올리고는 뒤집었을 것이다. 그러나 승진이가 연 지퍼 속 가방 안에서는 선생님이 생각한 의심 가는 물건이 나오지 않았다. 승진이는 강시처럼 담임선생님을 보고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가방 옆쪽에 있는 작은 지퍼를 담임선생님이 직접 열었다. 승진이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짧은 시간이 흘렀다. 승진이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듯한 표정을 하며 약간 펴져있던 손가락을 꽉 쥐었다. 어금니를 꽉 깨무는 얼굴이 더욱더 시무룩해졌다. 승진이가 반쯤 숙이고 있던 고개를 가슴에 닿을 정도로 내리는 순간 책상 위로 담배와 라이터가 떨어졌다.

  “따라와!”

  짧고 굵은 외마디 명령은 이경수 선생님의 전매특허다. 반 아이들 모두가 그 소리에 얼었다. 아이들은 숨을 죽였다. 담임선생님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뒷문으로 나갔다. 작은 목소리와는 달리 담임선생님의 문 닫는 소리는 요란했다.

  교실은 아무도 없을 때보다도 더 조용했다.


  승진이는 한 시간이 넘어서야  교실로 들어왔다. 예상보다 빨리 오기는 했지만 승진인 얼굴과 귀 그리고 목까지 온통 빨갛게 부어올랐다. 똥 씹은 표정까지 더해진 모습은 똑바로 쳐다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처절했다. 자리에 앉은 승진이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다음 날 승진이 아버지는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해야 했다. 이 일은 1학년 중간고사를 보기 훨씬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더욱더 안타까운 일이 중간고사가 끝나고 이틀도 지나지 않아 승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진이가 영어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은 반 아이는 그날 학교를 나오지 않았던 재규 말고는 없었다. 아무도 그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영어 선생님한테서 직접 들은 것도 아니고 승진이가 저 스스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반 아이들 누구도 영어 시간에 승진이가 졸고 있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다고 짝꿍 인열이는 소보다 조금 작은 눈을 부릅뜨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그 시간만큼은 다른 시간에 보여준 승진이의 수업태도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승진이가 영어선생님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왜 공고엔 여선생님이 없는 걸까? 공고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영어는 소련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학교 때 영어를 잘했다면 공고엔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영어선생님은 좀이 쑤셔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하는 아이들을 째려보거나 그것도 모자라 자빠져 자는 녀석에게 분필을 날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다. 분필이 빗나가면 지우개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러나 담배사건 이후 승진이 수업태도는 분명 달랐다. 칠판에 쓰는 내용을 모조리 옮겨 적었고 선생님이 강조하는 곳에는 밑줄도 그었다.


  승진이가 영어공부로 택한 방법은 책을 몽땅 외우는 단순 무식한 방법인데 그 방법을 알게 된 것은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다.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아저씨의 스포츠 신문을 동냥해서 보다가 영어공부 잘하는 법이란 짧은 기사를 보고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아저씨는 그냥 사진과 큰 글씨만 대충 보며 습관처럼 신문을 넘겼다. 헌데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야릇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인기 연예인의 사진을 발견 하고는 그때부터 슬로우 비디오가 되었다. 쭉 펴져있던 아저씨의 팔이 굽혀지면서 사진에 심취해있던 시간은 전혀 짧지 않았다. 승진이도 그 사진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신문 아랫부분에 짤막한 ‘영어 한마디’ 연재기사가 보였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영어를 잘하고 싶거든 문장을 통째로 암기하라’


 승진이는 영어를 잘하려면 문장을 통째로 외우라는 내용을 보고 교과서를 모조리 외워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드디어 시험 기간과 시간표가 발표되었다. 그날부터 승진이는 영어책을 외우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열심히 뭔가를 해본 것은 중학교 때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기억 말고는 없었다. 뒤로가기와 옆으로 타기를 넘어 점프의 높이가 탁월한 승진이의 롤러스케이트 실력은 그 동네에서는 따라올 애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영어는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어를 읽어 나가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모르는 단어들이 더 많았다. 영어사전을 보고도 읽을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사전이라곤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고 어떻게 보는 건지 알지도 못했다. 다행히 승진이에게는 두 살 많은 누나가 있었다. 모르는 단어를 누나한테 물어 발음을 한글로 옮겨 적고서야 보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승진이는 그때부터 안보고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던 것이다.


  시험이 끝난 이틀 뒤 영어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백승진이 누구지”하고 승진이를 찾았다. 그때까지 영어선생님은 승진이가 누군지 잘 몰랐던 것이다.

  승진이가 “네”하며 손을 번쩍 들었다. 승진이는 상기된 얼굴이었지만 밝아보였다.

  영어선생님은 승진이가 누군지를 확인하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승진이의 중학교 전적을 영어선생님까지 알고 있던 것이다. 그건 원죄가 되었다.

  “어떻게 영어 시험문제를 다 풀 수 있었지” 뭔가 꺼림직 하다는 듯 다그쳤다.

  그때까지도 승진이는 입고리가 위로 올라가려 했다.

  승진이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책을 다 외웠습니다.” 승진이가 이렇게 자신있어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그러나 영어선생님의 반응은 너무나 시큰둥했다.

  “그래~ 책을 외웠다고 영어를 잘하는 건 아니지....... 뭐 어쩌다 재수가 좋았네.”

  영어선생님은 별일도 아니라는 듯 관심을 끊고는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칭찬은 아니더라도 격려쯤은 해줄 수 있었던 상황이다. 승진에게는 ‘꼴통’이란 말보다 더 야속하고 지독하게 들렸다. 승진이의 올라간 입고리는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승진이 귀에는 출석부르는 아이들 이름조차 들리지 않았다. 담배 사건으로 아버지가 담임선생님에게 얼굴을 조아렸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께 뭔가 내가 꼭 그런 놈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싶었다. 그 소식을 아버지와 담임선생님께 알리기 전의 영어선생님 반응은 승진이의 꿈을 산산조각내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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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땐양
2008.09.24 16:31:17 *.122.143.151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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