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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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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7일 07시 02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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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 가지나 네 가지의 다른 얼굴로 살아 갑니다. 스스로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너무도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요. 다양한 얼굴이라고 해서 변장을 한다거나 가면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얼굴을 하고 살아갈 때마다 내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28, 직업은 동시 통역사입니다. 이름은? 비밀입니다. 사실, 제 이름이 비밀로 지켜야 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내 스스로도 내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제 스스로도 제 이름이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를 재희라고 부릅니다. 재희로 불리는 나는 모범생입니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시내에선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변호사를 아버지로 두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법조계 인사들의 집안이 그렇듯이 우리 집은 매우 보수적인 편에 속했습니다. 재희는 부족한 것 없이 자랐고 아버지를 닮아 무척이나 똑똑했으며 사는 동안 튀는 행동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재희를 둘러싼 친구들도 모두들 재희랑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이었습니다. 재벌가 아이들처럼 호사를 하며 살진 않았지만 모두들 별로 부족한 것 없이 자라났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난 아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 친구들 무리 중엔 재희의 남자 친구도 있습니다. 재희는 그를 일남이라고 부릅니다. 일남이는 ? 일남이는 남친 1이라고 해서 재희가 만든 이름 이구요. 일남이 보다는 훨씬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겠지요 ? 의대생입니다. 재희의 다른 친구들처럼 똑똑하고 바른 아이입니다. 일남이는 서울에 있는 의대에 시험을 봤다가 안타깝게도 잘 안 되었지요. 그 후에 그는 부산에서 의대를 나와서 지금은 부산 근교의 시골 마을에서 공중 보건의 중입니다.

 

재희는 일남이와 고등학교 동기입니다. 사람들은 일남이의 준수한 외모가 재희와 상당히 잘 어울린다고들 말을 합니다만, 재희가 일남이에게 끌린 이유는 일남이가 가지고 있는 믿음직스러움이었습니다.
일남이는 좀처럼 흔들리는 법이 없이 재희를 좋아해 주었습니다. 일남이 옆에 있으면
지진이 일어나도 끄덕 없을 것 같은 그런 믿음직스러운 기운이 재희를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요?

 

재희는 가끔 일남이와의 일생을 그려 봅니다. 그와의 일생은 아마도 잘 닦여진 고속도로 같을 것입니다. 일남이는 전문의를 마치면 큰 이변이 없는 한 일남이의 아버지가 운영 하시는 정형외과 병원을 물려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재희와 결혼을 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 재희는 갑자기 답답함을 느낍니다. 커다란 몸집의 구렁이가 서서히 재희의 목을 죄어 오는 것 같은 이상한 답답함. 그것은 일남이가 재희에게 주는 믿음직스러움의 이면이었습니다.

 

나를 헤더(Heather)’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헤더라는 이름은 미국에서 얻었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2년 동안 살았던 미국에서 나는 에리카라는 룸메이트를 만났습니다. 에리카가 어

느 날 나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며 헤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지요.

 

에리카가 내게 처음 그 이름을 주던 날, 나는 헤더, 헤더 하고 몇 번 그 이름을 불러 보았습니다.

헤더, 헤더, 상큼한 바람 냄새가 나는 듯했습니다. 그 때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했었던 이상한 자

유로움이 나를 덮쳐 왔습니다.

 

헤더는 히피입니다. 맨발에 긴 머리를 하고 있진 않지만 자유와 행복만이 그녀가 어떤 일을 결정

하는 데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헤더에게는 별 걱정이 없어 보입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지기 때문이지요.

 

헤더에게도 남자 친구가 있습니다. 헤더는 그를 이남이라고 부르지요. 눈치를 채셨겠지만 그는

남친 2입니다. 재희로 지내던 2년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던 헤

더는 휴가를 내어 홀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태국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그녀는 그 동안 지켜왔던

여러 가지 룰들에서 벗어났고?여기서 말하는 그녀의 룰들이란 정해진 계획대로 계획을 준수 하

며 사는 것’, ’오래 만나 보지 않고 새 친구를 사귀는 것’, ’생각해 보지 않고 몸부터 움직이는 것

들이다 -- 그러다 한 한적한 바닷가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관광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그 곳

에서 혼자 어슬렁 거리던 이남이는 배낭 여행족 이었습니다. 특별히 할 일을 정해 두지 않고 여

행을 하던 그와는 여러 가지로 관심사가 비슷해서 서로 말을 트기 시작했습니다. 헤더는 이내 그

의 손에 이끌려 작은 섬들을 더 여행을 하게 되었고 그 짧은 여행에서 그를 더 좋아하게 되었습

니다. 이남이는 마침 태국을 마지막으로 잠시 여행을 접고 돈을 벌기 위해 정착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고 헤더를 만나는 바람에 발길을 한국으로 돌린 것입니다.

 

이남이를 만나는 동안 헤더는 히피 헤더의 피가 몸 속에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이남이에겐 특별

히 성취할 무언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마음이 움직이는 데로 움직이는 것이 최고 랍니

. 지금은 헤더가 살고 있는 이 곳에 잠시 머물라고 그의 마음이 시켰습니다. 이렇게 살다 가도

어느 날 그의 마음이 이 곳을 떠나라고 하면 그 마음을 따라 어디론가 떠나 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헤더도 이남이에겐 많은 기대를 안 하게 됩니다. 그저 즐거울 만큼 그리고 딱 즐거울 만

큼만 구속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히피들의 사랑법 이지요.  

 

그리고 또 나에게는 연우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쓸 때 나는 부처님이 된 듯한 마음이

됩니다. 일상이 짜증이고 화낼 일이 곳곳에 있는데도 그 이름을 쓸 때는 이상하게도 잘 참아 냅

니다. 연우로 사는 나에게는 그런 속세의 작은 일들이 너무도 사소한 것들이라서 별로 짜증을 낼

만한 일이 아니랍니다. 사람들은 별 거 아닌 일로 화를 내고 슬퍼하고 서로 좋아하고 싫어하고

삽니다.

 

그러고 보니 연우로 돌아오면 나도 도 닦는 사람이 되는 것 군요.

IP *.129.19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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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10.07 16:04:34 *.97.37.242
재희와 일남,  헤더와 이남, 연우와 삼남?
능력있는 여자네. 그리고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사람들 맘 속엔 어느정도 그런 마음이 있는것 같아.
남의 사과가 더 커보인다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고 싶은...
나도 한번 그렇게 살아볼까? 나중에.... 재미난 교훈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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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8.10.07 22:24:56 *.37.24.93
재미있는 그림이네.
그림을 뚫어져라 봤더니 한사람에 세사람의 같은 사람이 겹쳐있네.
재희와 헤더 연우인가.
매직아이 처럼 그림을 겹쳐지게 봤더니 모두가 손을 잡고 있네. 30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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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09:28:42 *.38.102.209
그림이 나를 사로 잡을 듯, 현정아 숙제 다하고 삼나게 노올자. 숙제 밀린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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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10.08 09:34:08 *.244.220.253
재밌다~ 구라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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