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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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이야기(4)
이상한은 세 개의 원을 그렸다. 가운데 위쪽으로 하나를 그리고는 아래쪽에 좌우로 겹쳐지도록 두 개의 원을 더 그렸다. 원은 정삼각형을 이뤘고 정 가운데는 세 개의 원이 겹쳐졌다. 그리고 각각의 원 안에 천천히 글씨를 써가기 시작했다.
맨 위쪽 원 안에서 선을 밖으로 그었다. 아무래도 원 안에 글씨를 쓰기가 만만치 않아서인지 돼지 꼬리 비슷하게 그었다. 그 선 끝으로 ‘10년 정도 하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상한은 곧바로 왼쪽 원 안쪽에서부터 아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왼쪽으로 선을 땄다. 그리고 그 끝에 이렇게 썼다. ‘내 모든 열정을 바칠 수 있는 것’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인사만 나누고 아무 이야기 없이 돌아서서 하기 시작한 이상한의 행동에 반 아이들은 뭔 일 났냐는 표정 들이다.
“담임이 뭐하는 거냐.”
백승진이 코딱지를 파내며 멍하니 앉아있는 최인열에게 물었다.
“나도 모르거든. 그런 거 물어보지 마라.”
소보다 조금 작은 눈을 하고는 브이자로 만든 손가락으로 승진의 눈으로 ‘확’ 하는 소리와 함께 내지르다가 코앞에서 멈췄다. 승진은 그 뻔한 공격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손칼로 막는 시늉을 했다.
“최인열 너 그거 10년을 해도 내 눈 건드리지도 못할 꺼다. 아서라. 꺼~어~억”
짧은 시간이었지만 승진은 필살기 트림으로 상황을 종료시켰다.
이상한은 오른쪽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선을 그었다. 두 번째 문장을 쓸 때보다 더 빠르게 써나갔다. ‘그것은 내 밥벌이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빨간색 분필로 바꿔 들고는 위쪽 원 안에 ‘강점’라고 썼다. 아래쪽 좌우의 원에는 차례로 ‘열정’과 ‘돈’을 써 넣었다. 마지막으로 칠판의 오른 쪽 위에 이렇게 썼다.
‘출처 : 짐 콜린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서 얻어옴.
이상한은 이것을 반 아이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두 번째 ‘당신의 경제 엔진을 움직이는 것’을 ‘그것은 내 밥벌이로 손색이 없을 것’으로 바꿨을 뿐 비슷한 내용으로 칠판에 썼다.
“선생님 그거 국사책 몇 페이지에 나오죠.”
여태 교실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제도 기능반의 서경수가 갑자기 손을 들고 질문했다. 경수는 국제 기능올림픽에 우리나라 대표선수로 출전할 학교의 자랑이었는데 교실에서 떠들기는커녕 아이들과 이야기도 잘 나누지 않는 아이였다.
“음~~. 국사책에는 이런 거 안나 와. 출처로 밝혔듯이 짐 콜린스라는 미국의 경영학자가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뭐 너희들을 대상으로 하자면 나보다는 훨씬 덜 유명한 사람이지”
대학에서 경제, 경영을 전공하거나 회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짐 콜린스라는 사람을 아는 어른들도 별로 없을 텐데 실업계고등학교 학생들이 그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한은 짐 콜린스를 꽤 강조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결판을 못 내린 고슴도치 이야기의 결정판이 될 것이다.”
이상한은 평소와는 다르게 이야기를 좀 길게 가져갔다.
“사실 고슴도치 이야기는 실제 고슴도치와는 별 관련이 없다. 짐 콜린스가 한 고슴도치 컨셉에서 따온 이야기 정도로만 기억해 주기 바란다. 물론 고슴도치의 싸움 기술은 훌륭하다.”
이상한은 재규 쪽으로 잠시 눈을 돌렸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안다.”
“이것을 꼭 기억해 주기 바란다.”
“재규의 받아 뒤차기는 고슴도치의 한 가지 큰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여우의 화려해 보이는 여러 발차기 기술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위력적이라는 것을 재규가 아주 잘 설명해줬다.”
재규는 뭔지 모를 우쭐한 기분에 들떠 있었다. 이런 기분이 참 오랜만인 듯 얼굴이 빨개지기 까지 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한 것에 대해 관심과 칭찬을 받아 본 것은 이상한이 처음이었다.
이상한은 말을 이어갔다.
“자! 조금 진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오늘은 좀 진지 모드로 가보자.”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생각해보기 바란다.”
“손을 올릴 필요는 없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손도 마음으로 들어라.”
“누가 보는 사람도 없다. 의식할 필요도 없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고 솔직히 대답하면 되는 거다. 알았지!”
이상한이 특유의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하더니 ‘알았지’ 하면서 소리를 조금 높였다. 아이들은 일제히 “예”라는 소리와 함께 조용히 이상한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다음엔 뭘 하면 되는데요 선생님, 궁금해요.’하는 인상이 역력했다. 이상한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