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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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기온이 33도를 찍었던 지난 일요일, 저는 얼린 이온음료를 보냉 백에 가득 담아 종합운동장 역에 내렸습니다. 온라인으로 예매했던 티켓을 바꾼 뒤, 간단한 요깃거리를 마련해 제 좌석으로 가 자리에 앉았더니 엉덩이가 뜨끈뜨끈합니다. 냉매 스카프를 적셔 목에 두르고 분무기가 달린 휴대용 선풍기로 바람을 쐬는데도 직사광선과 습도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졌습니다. 경기가 있는 다섯 시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있었습니다. 이런 날씨에는 원래 야구장에 가지 않지만, 이날은 특별했습니다. 바로 엘지 트윈스 팀의 대표적인 선수 중 하나였던 박용택 선수의 은퇴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2013년부터 야구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야구가 뭔지도 몰랐지만, 당시에 다니고 있던 회사에서 가끔 야구 티켓을 나눠주어 회사 동료들과 어울려 처음 가봤었습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고 맛있는 메뉴와 시원한 맥주를 먹으면서 야구 규칙을 하나씩 배우고 있었을 때, 박용택 선수가 안타를 치고 1루로 나갔습니다. 1루 베이스를 밟고 서있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 순간 문득 야구라는 종목이 제 인생에 깊숙하게 끼어들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같은 팀을 응원하는 신랑을 만나며 자연스럽게 야구의 기쁨과 슬픔에 빠져들었습니다. 박용택 선수 이름이 박힌 유니폼을 사고 코로나로 경기장 입장이 제한되었던 2020년 전까지 야구장을 참 많이도 갔었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박용택 선수는 이미 선수 활동을 마무리했었습니다. 입장 제한이 완전히 해제된 올해가 되어서야 제대로 은퇴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9년 동안 한 팀에서 뛰면서 최다 안타 신기록을 세우는 등 꾸준하고 성실하게 좋은 모습을 보여준 선수였습니다.
일요일 롯데와의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하고 드디어 박용택 선수의 은퇴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야구단은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준 선수가 은퇴할 때 그의 업적을 기리는 목적으로 그 선수의 등번호를 앞으로 다른 사람이 쓰지 못하게 하기도 하는데요. 이를 ‘영구결번’이라고 합니다. 박용택 선수의 등번호인 33번도 이번에 영구결번이 되었습니다. 잠실 운동장의 전광판 옆에 숫자 33이 선명하게 적힌 깃발이 달리며 구단에서 준비한 불꽃놀이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작은 단상 위로 올라온 박용택 선수의 고별사가 이어졌습니다. 그는 19년 동안 같은 직장, 같은 일을 하면서 매일매일을 승리를 생각하며 열심히 경기를 준비하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오직 야구만이 그의 인생에 중심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 대목에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면서 아마도 일을 위해서 가족을 최우선으로 둘 수 없는 선수들의 숙명 때문에 여러 감정이 교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도 이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참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고별사를 들으며 저는 제가 만약 19년 동안 같은 일을 하고 은퇴를 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일단 지난 10년간의 직장 생활을 돌아봐도 후회스러운 장면이나 아쉬웠던 결과가 떠올랐습니다. 그제서야 박용택 선수가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더 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몰입하고 충실하게 보낸 하루하루가 엄청난 경지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치열한 보낸 현역 시절 이후 맞이하는 휴식은 그만큼 달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진정한 휴식이라고 하면 뭔가 제대로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편안하고 팬시(Fancy)한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거나 멋진 것을 보러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휴식시간의 작은 한 방울까지도 온몸이 즐겁게 받아들이는 듯이 즐기려면 휴식을 하기 전에 자신의 에너지를 마음껏 활용하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월요일에 출근하는 것은 너무 싫지만, 반대로 금요일 퇴근길이 유난히 더 즐겁게 느껴지는 것은 한 주 동안 분주하게 일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꼭 회사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에너지를 써가며 뭔가에 골몰하고 나면 그 후에 오는 휴식이 유독 고맙고 좋습니다. 즉, 충만한 휴식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며 보낸 시간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다시 한번 박용택 선수가 현역으로 뛰는 동안 참 즐거웠고, 고마웠고 그만큼 그의 앞으로의 행보도 응원합니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마음에 간직하며 나중에 돌이켜 보았을 때 오늘을 다시 산다고 해도 더 잘 할 수 없을 만큼 몰입한 하루를 살아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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