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글리
- 조회 수 823
- 댓글 수 1
- 추천 수 0
저는 지금 우붓에 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에 이동했으니 딱 일주일 만이네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일주일이 어떻게 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중입니다. 아무것도 안 할 계획으로 발리에 온 터라 별다른 계획도 세우지 않았고 와서도 딱히 뭘 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때마침 허리를 다친 덕분에 더 더욱 뭔가를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허리가 아프니 요가도 어렵고 서핑도 어렵고, 한시간 이상 걷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참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남들 다하는 거 저도 하려고 기웃거렸을 거고, 또 종일 걷거나 활동하며 몸을 혹사시켰을 거거든요. 저는 활동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안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허리를 다쳐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덕분에 원래 계획인 ‘아무것도 안하기’를 아주 충실하게 수행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곳에서 제 하루 일과는 매우 단순합니다. 주로 걷고, 먹고, 마시고, 쓰고, 자기로 이루어지죠. 하루 4~5번씩 30~40분씩 걷습니다. 여기저기 걸으며 구경하다, 지치면 오토바이를 빌려 우붓 이곳저곳을 쏘다닙니다. 배고프면 식당가서 밥 먹고, 목마르면 카페 들어가 음료수 마시고, 뭔가 떠오르면 글을 쓰고, 잠이 오면 잡니다. 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데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싶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땐, ‘실용성’과 ‘효율’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이건 지금도 제 핵심가치들입니다) 무엇을 하든 최대한 빠른 시간에 더 많이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죠.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삶에 유용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무용無用’한 활동과 시간을 매우 싫어했죠.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매우 비효율적으로 하루를 보내고, 정말 쓸모없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게 싫지가 않습니다. 꽤 즐겁습니다.
사실 저는 오랫동안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요. “잘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라고!” 그런데 그게 오히려 제 두려움을 감추는 행위일 뿐이었더라고요.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더더욱 ‘유용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무용함'의 가치도 발견하게 됐습니다. '유용함' 이상으로 중요한 건 ‘유용함과 무용함이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 발리는 힌두교를 믿는데요, 힌두교에선 선과 악을 철저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이 나름의 역할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균형 잡힌 세상이 된다고 보지요. 선한 신도 악한 일을 저질 수 있고, 악한 신도 나름 정의로울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 개념이 마음에 듭니다. 모든 건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것 말입니다.
좀 쓸모 없어도 되잖아요. 가끔은 비어 있어야 뭔가를 담을 수도 있고, 새로운 쓸모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 하루 더 비어있길, 더 가벼워지길 바라며 발리의 바람 한 줌을 오늘 마음편지에 동봉해 보냅니다.
Terima kasih (뜨리마 까시) 감사합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4336 | 화요편지 - 오늘도 덕질로 대동단결! | 종종 | 2022.06.07 | 623 |
4335 | 뭐든지는 아니어도 하고 싶은 것 정도는 할 수 있다는 마음 [2] | 어니언 | 2023.11.23 | 641 |
4334 | [수요편지] 똑똑함과 현명함 [1] | 불씨 | 2023.11.15 | 643 |
4333 | 작아도 좋은 것이 있다면 [2] | 어니언 | 2023.11.30 | 661 |
4332 | 화요편지 - 생존을 넘어 진화하는, 냉면의 힘 | 종종 | 2022.07.12 | 664 |
4331 | 등 뒤로 문이 닫히면 새로운 문이 열린다 [3] | 어니언 | 2023.12.28 | 670 |
4330 | [수요편지] 장미꽃의 의미 [1] | 불씨 | 2023.12.05 | 672 |
4329 | [내 삶의 단어장] 오늘도 내일도 제삿날 [2] | 에움길~ | 2023.06.12 | 682 |
4328 | 역할 실험 [1] | 어니언 | 2022.08.04 | 689 |
4327 | [수요편지] 미시적 우연과 거시적 필연 [1] | 불씨 | 2023.11.07 | 691 |
4326 | [늦은 월요 편지][내 삶의 단어장] 2호선, 그 가득하고도 텅빈 | 에움길~ | 2023.09.19 | 694 |
4325 | [수요편지]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는 조직문화 | 불씨 | 2023.10.11 | 694 |
4324 | 충실한 일상이 좋은 생각을 부른다 | 어니언 | 2023.11.02 | 695 |
4323 | [수요편지] 허상과의 투쟁 [1] | 불씨 | 2022.12.14 | 697 |
4322 | [월요편지-책과 함께] 인간에 대한 환멸 [1] | 에움길~ | 2023.10.30 | 701 |
4321 | 케미가 맞는다는 것 [1] | 어니언 | 2022.09.15 | 703 |
4320 | 두 번째라는 것 | 어니언 | 2023.08.03 | 708 |
4319 | [내 삶의 단어장] 엄마! 뜨거운 여름날의 수제비 | 에움길~ | 2023.11.13 | 710 |
4318 | 용기의 근원인 당신에게 [1] | 어니언 | 2023.12.14 | 712 |
4317 | [월요편지-책과 함께] 존엄성 | 에움길~ | 2023.09.25 | 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