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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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심장이 아니라 위장에 깃들어 사는 게 아닐까요.
유난히 힘들고 쓸쓸한 날이면 포근포근한 감자국을 끓여 밥 한 숟가락을 말아야 하루를 견딜 수 있다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저도 그래요.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이 외롭고 고단한 날이면, 따끈한 설렁탕 한 그릇에 김치 한 종지를 놓고 한 술 한 술 후후 불어가며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천천히 한 그릇을 비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설렁탕, 순대국밥, 콩나물국밥, 육개장, 곰탕, 뭐가 됐든 밥과 국물이 기본을 이루는 국밥 한 그릇이면 잠시나마 헛헛한 속마음을 달래고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갈 기운이 난달까요. 말하자면 제 버전의 위로음식은 국밥인 셈입니다.
“컵에 차가운 우유를 붓고 오레오 예닐곱 개를 부수어 넣는다. 스푼으로 먹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앞에선 먹지 않는다.” – ‘음식의 위로’ 중, 에밀리 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굳이 먹지 않는 음식, 그렇지만 혼자 있을 때면 생각나는 나만의 위로 음식을 갖고 계신가요? ‘음식의 위로’는 약 2년 전, 코로나 백수 시절 자의 반 타의 반 칩거 생활을 하던 때 만난 책입니다. 저자 에밀리 넌은 뉴요커, 시카고 트리뷴 등 유수의 매체에 관련 칼럼을 써온 화려한 경력의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가정요리전도사라고 해요.
당시 저는 작정하고 감행한 퇴사였음에도 앞날에 대한 불안과 초조함으로 인해 꽤나 우울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음식의 위로’라는 제목에 맞게 참으로 오랜만에, 제대로 위로받는 독서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사실 저자의 이력을 보고 이국적이고 맛있는 요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멋진 문체로 가득한 에세이를 만날 줄 알았다가, ‘그런 책 아니거든!’이라며 정색을 하며 달려드는 저자에게 제대로 멱살을 잡힌 기분이었답니다.
저자는 멋진 애인과 그림 같은 집에서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삶을 살고 있는 성공한 칼럼니스트였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던 오빠의 자살 소식이 날아들면서, 가문의 내력 같은 알코올 중독에 다시 빠져들고 순식간에 애인과 집과 커리어를 모두 잃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화려한 칼럼니스트로서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그녀가 그 모든 것을 잃은 시점에서 시작되죠.
저자는 알코올 중독과 오빠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과 방황의 시간, 그리고 그녀와 가족들을 파국으로 이끈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이를 딛고 일어서기까지 길고 힘든 회복의 과정을 돌려 말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찬찬히, 아프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회복의 여정 곳곳에는 그녀를 깜깜한 절망에서 한줄기 빛이 되어준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 그리고 음식의 추억이 함께 합니다.
“에밀리, 피클은 내 위로음식이 아니야.“ 하긴 피클이 마사의 위로음식이라고 할 만한 근거는 딱히 없었다. 그러나 마사가 덧붙인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마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잼과 젤리를 만들고 피클이나 청을 담그는 등의 집안일을 강제로 해야 했고 나중에는 스스로 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우리 집의 하녀였어… 어머니는 내가 요리나 청소를 할 때만 곁에 있게 했어.” 마사가 말했다. – P. 112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우리 가족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의지하고 싶을수록 더 멀리 밀어내고 결국은 상처만 입히고 마는 파괴적인 가족 관계, 천형 같은 알코올중독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저자는 기나긴 상실과 더딘 회복의 여정 곳곳에 가족, 친척, 친구로부터 얻어낸 귀중한 레시피들로 이정표를 만들어 둡니다. 정확한 지명과 거리 표시 대신 친절한 레시피들이 곳곳에 등장하는 지도책이랄까요. 목적지도, 가는 방법도 모르지만 친절하고 애틋한 레시피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꼭 도착해야 할 그 곳에 와 있음을 알게 되는 그런 책이요.
사람들은 살면서 좋은 시간보다 나쁜 시간을 더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니 나는 운이 좋다. 많은 추억이 음식과 연관돼 있어서 그 덕분에 트라우마에서 치유로, 비통함에서 희망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또한 음식은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데 기준이 되어 주었다.” P. 363
음식은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작고 단순한 몸짓으로도 기적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수프 너 주려고 가져왔어.’ P.364
고통과 좌절의 시간을 위로와 치유로 이끌어 주는 음식의 힘은 셉니다. 그리고 그 음식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과의 연대는 더욱 더 힘이 세지요. ‘음식의 위로’는 음식과 친구,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가장 다정한 두 존재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날씨도 마음도 우중충한 하루라면 오늘, 나 만의 위로음식으로 자신을 대접해주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책 한 권을 놓고, 또는 좋아하는 드라마라도 한 편 틀고 나 만을 위한 식사와 함께 천천히 음미하는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위로가 필요한 하루에 듣고 싶은 노래, The Birds의 Turn Turn Turn - To everything there is a season를 소개해드리며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2QoiX4X5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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