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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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일기-20081024
그때 그 말씀이
선생님, 저는 그림을 그리다가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요.
선생님께서는 왜 그때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제가 보기에 저는 무척 엉성하거든요. 어쩌면 선생님께서 저를 기억 못하실꺼라는 생각도 했었어요. 저는 미술반도 아니었잖아요. 선생님께서는 1,2,3학년 전체를 미술수업을 맡으셨고 한해에 졸업하는 학생이 600명 정도 되는데 어떻게 기억을 해요. 저는 선생님께서 기억하실만큼 특별한 학생이 아니었잖아요. 저는 선생님을 미술 선생님으로 기억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저를 기억하실만한 것이 없어요. 저의 담임선생님도 아니셨고, 특별활동시간에 배드민턴을 같이 몇 번 쳤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것도 없는, 수많은 학생들 중에 하나일 뿐이었으니까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미술반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워낙에 많아서 미대 가려는 사람만 미술반에 들 수 있다해서 저는 한번도 미술반에 들지도 못했어요. 그렇다고 대학생이 되어서 못 푼 원을 풀었던 것도 아니예요. 그때도 그림과는 멀었죠.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왜 선생님을 찾아가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죠. 그림을 그리지도 않으면서도 선생님이 생각났으니까요.
그때 왜 선생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어요. 선생님 혹시 그거 매번 써먹으시는 레파토리 아닌가요? 막무가내로 덜렁 찾아와서 그림 그리고 싶다고 하면, 간지를 짚어보는 것. ‘소띠, 음력 2월 13일, 축시.’ 저는 그때 호적에는 이런데, 어머니께서는 늘상 음력 2월 14일로 기억을 하신다는 말까지 했었죠. 선생님께서는 오른손을 손거울을 쥐고 보듯이 앞으로 드시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다른 손가락들의 마디를 짚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음, 재능은 있구만. 어머니께서 기억하는 사주대로 하면 평범하고 무난하고 행복하게 살아. 어머닌 딸이 그냥 무난하게 살길 바라는 구만.”
저는 그때 그 말이 왠지 서러웠어요. 저에겐 그 말씀이 ‘외롭겠구만.’하는 말로 들렸거든요. 그런데 선생님 정말 간지 짚으실 줄 아시는 건가요? 그거 짚어서 그림 쪽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요?
제가 대학교 1학년생이 되었을 때 교회선배가 제 손금을 봐준 적이 있어요. 제 손금을 보더니 ‘정치에 관심이 많구만.’ 그러던걸요. 저는 정치에 하나도 관심이 없었어요. 누가 대통령을 하든지, 누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사람들이 마구 떠들어대도 그건 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거든요. 선배들이 나오라고 하는 집회도 별로 나가고 싶지 않았고, 학교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노래나 구호에도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고. 그 선배는 제가 정치, 그때 대학생들이라면 늘 이야기하던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지라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얘기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의 간지도 선배의 손금처럼 제게 무슨 말인가를 해주고 싶어서 그랬을 거라고.... 그렇게 여기다가도, 그렇게 여기다가도, 그렇게 여기다가도, 믿거나 말거나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저는, 저는 그 말을 믿고 싶었나봐요. 그 말씀을 많이 의지했구나 합니다. 저도 저 스스로를 응원하고 위로할 말이 필요하니까요.
세상에 취미로 삼을 만한 수많은 것들이 있는데 문화센터에 가서 제가 등록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많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등록하고서도 오래하진 못했죠. 그리고 나중에 또 미술반에 등록하고. 계속 그 옆을 맴돌았어요.
선생님, 혹시..... 그 말씀으로 그때 절 그림에 묶어두신 건가요?
가끔은 그게 너무나 궁금할 때가 있어요. 모르고 지내는 게 좋겠다 싶기도 하지만 한번 궁금해지면 '정말일까?' '아니라면 왜 그러셨을까?' 궁금증이 커지는 것만큼 '그게 중요해?'라고 반박하는 마음도 커지곤해요. 요즘 불안하기도 하고. 얼마 후에 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고. 불안할 때 뭔가 붙잡고 싶어지고. 무엇을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궁금할 때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떠올라요.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선생님이 진짜로 간지를 짚어서 말씀하셨든지, 아님 제게 용기를 주려고 그러셨든지 아무 상관없는 때가 오면 그때 알아볼래요. 그걸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은 때에. 그게 뭔지 알아도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을 때, 그때. 그때까지는 궁금한 거 그대로 덮어둘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