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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蘇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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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29일 23시 19분 등록

 

2006 11

 

따르르릉따르르릉…’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깨었다. 두껍게 내려진 커튼 때문에 사방은 어두웠다. 손을 뻗어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대었다. 아직 몸은 침대에 엎으러진 자세 그대로였다.

안녕, 좋은 아침!

어제 잠자리에 들면서 르노와 통화를 했던 기억이 났다. 아침에 일어날 일을 걱정했더니 그가 전화로 깨워주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지금 6, 그는 조심스럽게 나를 깨우며 아침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그 역시 아직 이불 속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잠에서 덜 깬 그의 목소리는 섹시했다. 통화는 30분이나 계속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 지극히 충만해졌다. 그의 목소리는 갈수록 촉촉해졌다. 오크통 속에서 잘 익은 와인처럼 허스키하게 그을려있는 그의 목소리가 내 온 몸의 세포를 일으켜 세웠다.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지낸 2년의 세월은, 같은 이태리 땅에서의 몇 번의 아침 통화로 다시 옛날 그 때의 시간으로 빠르게 복구되었다.


드디어 오늘 2년 만에 그를 만난다.

나는 한국에서 날아가고, 그는 스웨덴에서 날아왔다. 이태리 밀라노의 IT 컨벤션에 참가한 그와, 베로나의 한 음악 페스티벌에 한 그룹을 끌고 참가한 내가 밀라노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틀 뿐이었다. 가족이 있는 그가 출장을 핑계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나 역시 다른 프로젝트가 코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오래 머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 동안 그를 잊었다 생각했다. 그냥 어쩌다 여행지에서 만나, 하루 저녁 좋은 인연을 맺은 것뿐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려 애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가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느닷없이 이메일을 보내왔을 때 나는 무척 떨고 있었다. 잊었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그와의 기억은 고스란히 내 가슴 속에 살아있었다. 나는 단지 잊으려고 애를 썼을 뿐이다. 어떻게 그는 내 출장계획을 알았을까. 그는 우연히 나의 웹사이트에 들어와 내가 새롭게 시작한 비즈니스를 주목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태리 페스티벌 출장 계획이 자신의 밀라노 출장과 비슷한 시기인 것을 확인한 그는 나를 꼭 다시 한 번 만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그는 내가 시간을 낼 수 있는지를 정중히 물었다. 그가 말하는 시간은 잠깐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하지 않았다. 대답을 망설이며 며칠 시간을 보내는 사이 그는 내가 그의 메일을 받았는지 확인하는 메일을 다시 한 번 보냈다. 편지 반갑다. 상황을 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를 다시 봐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나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유보한 채 그에게 간단한 답 메일을 보냈다. 사실 그가 얼마나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면서 한편 두려웠다. 그를 만나면 이전의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가 주었던 떨림이 다시 살아났다. 겁이 났다. 간단히 하지 못하고 우회적인 답으로 그를 시험하는 자신이 무서웠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끝내 나는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나는 어느새 전화 다이얼을 돌려 이태리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티켓을 며칠 연장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르노는 다만 나에게 하룻밤의 인연은 아니었다. 그는 내 안에서 여자를 꺼내준 흔치 않은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2004년 여름, 이태리 가르다 호수 연안 도시인 리바에서였다. 이태리의 태양이 가장 아름다운 7, 그곳에서 재즈 페스티벌이 열렸다. 그는 그곳에 잠깐 관광 중이었고 나는 새로 신설된 그 페스티벌을 참관하기 위해 그곳으로 날아갔다. 한국팀 참가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주최측과 몇 번의 미팅을 하고, 앞으로 있게 될 수요를 위해 가르다 호수를 비롯 이태리 북부 관광지를 물색하는 것이 내 출장의 목적이었다. 페스티벌이 마감되던 날, 주최측은 리바 외곽의 한 전통 식당에서 파티를 열었다. 그날 그곳에 초대된 그가 내 옆에 앉았다. 페스티벌 본부의 음악감독 알레시오와 그는 음대 친구라고 했다. IT 비즈니스를 하는 그가 스위스 취리히 음악 컨서바토리에서 오르간을 전공했다는 것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는 대화가 잘 통했다. 파티 중에 마신 와인으로 적당히 기분이 좋아진 몇몇 무리들은 시내 댄스 바로 자리를 옮겼다.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동안에도 심야의 리바는 조용했다. 인구 3만도 안되는 작고 조용한 시골 도시에 어떻게 이런 댄스 바가 숨겨져 있었을까. 그 동안 리바를 몇 번 다녀갔지만 어디에도 이런 고상한 댄스 바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디든 도시에는 잠들지 않고 아침을 맞는 무리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와 르노는 죽이 잘 맞았다. 어색한 나를 편안하게 리드하는 그에게 스텝을 턱 맡긴 채로 나는 여러 번 그와 춤을 추었다. 새벽 2가 다 되어서야 우리는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제법 시원하게 불고 있었다. 어느새 거리에는 그와 나만 걷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알레시오 마저 내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는 우리 앞에서 사라졌다. 그는 떠나면서 르노에게 의미 심장한 윙크를 보냈다.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를 바라보며 내가 웃었다. 그 웃음이 응원의 웃음으로 느껴졌는지 그는 알코올 기운에 힘들어하는 나를 자기 어깨에 끌어다 기대게 했다. 우리는 천천히 리바의 거리를 걸었다. 거리의 올리브 나무들은 침침한 가로등 아래서 졸고 있었다. 그가 손으로 동쪽에 높이 솟은 산을 가르켰다. 그곳에는 크라운 모양의 성이 어둠 속에 떠있었다. 리바의 암벽 산은 어둠에 맘모스처럼 거대한 윤곽만 드러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 위에는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조명으로 신비롭게 떠있는 성과 그 위로 걸린 초승달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한없이 엑조틱한 리바의 거리를 섬세한 유럽 남자의 어깨에 기대 걷고 있는 나, 갑자기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다다왔다. 꿈 속에서나 보던 장면이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다니!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꼬집었다. 그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으흐흐흐.. 갑자기 내 입에서 어두운 웃음이 흘렀다. 커다란 그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꿈인가 해서요.

그래서? 꿈이 아닌 게 증명이 된 건가요.

.

 

어느새 우리는 아침마다 과일과 야채 장이 서는 도심의 광장을 지나 시계탑 앞에 이르렀다. 시계탑 옆에는 아순타 마리아 성모 성당이 있었다. 성당의 마당에는 가로수 보다 더 키가 크고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이 군데군데 운치있게 서 있었다. 우리는 잠깐 올리므 나무 아래 놓인 한 벤치에 앉았다. 그 벤치는 어제 아침 내가 이 광장에서 검붉은 체리와 라스베리를 사들고 먹었던 자리였다. 잘 익은 체리를 똑똑 따 먹을 때만 해도 다음날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고 보니 우리들의 만남에 우연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 수많은 역사가 우연이 계기가 되어 일어나고, 운명적인 사랑도 우연히 시작되는 것 아닌가.

 

어제 여기서 내가 체리를 사먹었거든요. 바로 이 벤치에 앉아 먹었지요. 그런데 오늘 여기에 당신과 이렇게 앉아있게 되는군요.

맞아요. 사람의 만남이란 수수께끼 같아요.

클라인 슈테판이란 사람의 책, <우연의 법칙>을 읽은 적이 있는데요. 그 사람도 나 만큼 우연에 관심이 많았나봐요.

그 사람이 뭐라던가요?

우연은 필연이 가진 가능성으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 인생이 더욱 풍요로와진다고요.

희진, 당신이 그 말을 하니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말이 기억나네요.

그도 우연에 대해 인상적인 말을 했나요.

그래요. 우연은 신이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하기 싫을 때 사용하는 신의 가명이라고 했어요.

그 말은 우연도 필연이다, 뭐 그런 뜻이 되겠네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만난 것도 그럼 필연이 되는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앞서나가는 내가 좀 적어졌다. 그러나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전율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건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것에 있었던 것이었다. 

성당을 지나 항구의 광장 쪽으로 내려가면 여러 개의 바와 음식점들이 있고, 호수를 마주한 코너에 내가 묵는 호텔 <솔레 Sole>가 있다. 헤어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만남이 필연은 아닐지라도 나는 무언가 아직 미진한 기분이었다. 그의 표정도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날씨가 쌀쌀한 겨울이었다면 평소에 손이 차가운 나는 벌써 그의 손을 잡았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의 코트 속에 내 손을 먼저 집어 넣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그때까지 제대로 손도 잡아보지 못했다. 춤을 출 때 의례적으로 잡아 본 것이 전부였다. 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손을 잡았다. 그가 몸을 내 쪽으로 돌렸다. 그는 내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내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흐릿한 불빛 속에서도 그의 눈은 유난히 반짝였다. 그이 눈은 우물처럼 깊었다. 남자의 눈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나는 호수 같은 그의 눈 속으로 겉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그의 눈은 침묵 속에도 간절히 말하고 있었다. 그의 두 눈 속에 나를 향한 갈망이 가득 넘쳤다.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나는 무의식 중에 고개를 틀어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그의 키스는 시락 보드카 같았다. 벨벳처럼 부드럽고 향수처럼 달콤했다.

아직 목덜미에 남아있는 그의 뜨거운 입김 때문에 지난 밤은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잠깐 잠드는가 싶었지만 새벽녘에 다시 깼다. 뒤척이는 것도 고역이었다. 잠자기를 단념하고 아침 조깅을 나갔다. 힙합 청바지를 꺼내 입고,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맨 후 주머니에 에세를 챙겼다. 출국할 때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미리 구입해 둔 것이다. 나는 담배를 잘 피지 않는다. 내가 담배를 필 때는 술을 마실 때 뿐이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내 몸은 니코틴도 함께 원했다. 한국에서의 술자리라면 옆 사람의 담배를 한 두 개피 얻어 피면 그만이지만 외국에서는 그러기가 곤란했다. 못 얻어 필 것도 없지만 오랫동안 에세만 피워온 나는 그 어느 외국 담배도 입맛에 맞지 않았다. 호수가 공원 길을 따라 달렸다. 공원은 이미 조깅하러 나온 사람들과 강아지를 산책시키러 나온 노부부들로 꽤나 붐볐다.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새벽 신선한 공기 속에서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피우는 담배 한 가치의 맛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으랴.

 

몇 년간 금연을 하던 내가 다시 담배를 피게 된 것은 10년 전 뉴욕에서였다. 그 때만 해도 한국은 공공장소에서 여자가 담배 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매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담배 필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번거롭고 치사해 나는 담배를 끊었었다. 그런데 뉴욕에서의 어느 날 아침, 조깅을 나간 센트럴 파크에서 나는 한 젊은 여자를 눈부시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공원 벤치에 앉아 한가한 템포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히피풍의 머플러를 목에 멋드러지게 늘어뜨린 그녀는, 남의 눈치나 살피며 뻐금거리는 내 모습과는 완전 딴 판이었다. 유유히 담배연기를 내뿜는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포스는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그 길로 거리의 벤더에게 달려가 (무척 비싼) 말보로 라이트 한 갑을 샀다. 말보로를 들고 센트럴 파크 벤치에 앉은 나는 꽤 흥분했다. 담뱃불 붙이는 손이 마구 떨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랜만에 빈 속에 피는 담배 맛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그 계기로 담배를 다시 피게 되었다. 뉴욕을 시발로 나의 해외 출장은 빈번하게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이국 땅에서의 담배 피는 자유를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유럽식의 부페로 준비된 <솔레> 호텔의 아침 식단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침마다 바꿔주는 수프가 오늘은 칼데로 수프였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때문에 불멸하게 된 칼데로는 볼락이라는 생선으로 만든 수프다. 이태리에서 아침에 칼데로 수프를 먹는다는 건 드문 일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내가 칼데로 수프를 먹은 날에는 늘 행운이 따랐었다. 지도도 없이 나선 길에서 뜻밖의 도움을 받거나, 현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일부러라도 해보고 싶은 홈스테이 경험을 해보거나, 낯선 도시의 공연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회를 볼 수 있게 되거나.아침을 다 마치기 전에 그가 내게로 왔다. 나는 에스프레소 더블 하나를 더 시켜 그에게로 내밀었다. 이태리에서 에스프레소 없이 맞이하는 아침은 생각할 수 없다.

 

길이가 42킬로에 달하는 가르다 호수는 한쪽에는 깎아지르는 알프스 산맥이 높이 솟아있고 다른 한편은 평원이다. 피요르드처럼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멋진 풍광과 중세의 골목들을 그대로 간직한 곳곳의 호반 마을들은 클림트의 그림에도 등장했을 정도로 하나같이 아름다왔다. 태양이 좋아서 이곳은 일년 내내 유럽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휴양지다. 유람선은 호수 양편의 마을을 지그재그로 들르며 남단 실미오네까지 내려간다. 배를 타고 가다 아무 곳에나 내려 놀다가 다음 배를 타고 원하는 마을로 이동하면 하루 동안 즐거운 관광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날 가르다 유람선을 타고 리모네와 데산짜노에 들러 실미오네까지 갔다. 실미오네에는 점심 때쯤 도착했다. 우리는 먼저 토스카나 농가의 정취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조그만 카페에서 점심을 먹었다. 야외에 길게 늘어선 카페 테이블은 어디나 사람들이 가득했다.

여기 참 근사하군요. 같은 이태리지만 마치 시간을 뛰어넘어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아요.

나는 이곳에서만 아니라 어제부터 줄곧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있는 걸요.

 

그는 어제부터 작업 멘트 같은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단순히 간지럽기만 한 이태리 남자들의 말과는 달랐다.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나는 어느새 그의 말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그의 말에는 그의 퍼스낼리티가 녹아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말을 할 때 그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나는 남자에 대해 무조건 쉽게 빠지는 타입이 아니다. 35년 인생을 뒤돌아보건대 남자와의 관계를 단순하게, 한 순간의 감정으로 결정해버린 적은 결단코 없었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이태리에 오면 입에 꿀을 바른 것 같이 달콤하게 뽑아내는 이태리 남자들의 매끄러운 말의 성찬을 경계하는 편이었다. 어쩌다 맘에 끌리는 상대가 나타나도 결국 일을 끝까지 몰고가진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언제나 진지해졌다. 자유로운 이국 땅에서 아무 생각없이 여행이 주는 일탈에 몸을 맡겼더라면 해외 출장이 밥 먹듯 잦은 나에게는 엄청난 역사들이 펼쳐졌을 것이다. 요즘 많은 서양 남자들이 동양 여자들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낀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동양 여자들이 팔등신 비율로 잘 빠진 서양 남자들을 보면 괜한 동경을 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대단한 미모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이목구비 나무랄 데 없고 나름 지적인데도 있고, 성격까지 좋아서 누구하고나 쉽게 친해지는 나에게 사건이 생기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르노에게 느끼는 감정은 아주 특별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로마 시대 때 축조된 로카 스칼리게라 성(the Rocca Scaligera)을 둘러보고 돌들을 가지런히 박아 만든 중세 풍의 실미오네 골목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린아이들처럼 아이스크림 콘을 손에 들고 핥으며 서로의 입술을 훔쳐보기도 했다. 실미오네 부두에는 두 남녀가 오래도록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녀가 자연스럽게 키스를 하는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았다. 뭐든 숨어서 해야하는 수치의 문화 속에 자란 나는 서양아이들의 그런 분방함에 괜히 질투가 나곤 했었다그런 분방함은 나의 유전자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옆에 서있는 이 남자, 부드런 갈색 머리에 깊고 맑은 눈을 가진 이 남자, 웃을 때는 이마와 입가에 사정없이 주름이 잡히는 이 남자, 이 사랑스런 남자를 바라보면서 난는 유전자를 변형해서라도 분방함을 한 방울 내 안에 주사하고픈 유혹을 강렬히 느꼈다. 어젯밤의 키스는 참으로 따뜻했다. 입술이 가슴을 위로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몰래 그의 입술을 훔쳐보았다. 그를 향해 타오르기 시작한 이 은근한 갈망을 그가 알까. 순간, 내 얼굴이 붉어졌다. 나의 눈길을 느꼈는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가 웃었다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지그시 힘이 주어졌다.    

 

돌아올 때는 쾌속선을 탔다. 다른 마을에 들르지 않고 리바까지 직접 오는 배였다. 호수에는 윈드 서핑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갈매기 떼처럼 하얗게 호수를 메운 돛들은 바람을 가르며 멋지게 달렸다. 우리는 갑판 테이블에 앉아 한 방향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어느새 나의 머리는 그의 어깨에 놓여있고 그의 손은 내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호수는 점차 황혼에 물들어 갔다. 멀리 리바 항구와 <솔레> 호텔이 보였다. 황혼이 내리는 저녁의 리바는 은은한 네온의 불빛과 함께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천지가 파스텔 물감을 뭉게놓은 것처럼 부드럽고 안온한 그 저녁, 그가 내 옆에 있어 행복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결혼한 남자란 걸 오늘 하루 저녁만 내 유전자가 잊어주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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