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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일 02시 09분 등록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멀어져가는 밀라노 시내의 모습을 눈이 짓무르도록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우리의 열정이 알알이 새겨진 저 구름 아래의 땅, 그와 함께 한 시간들이 영상처럼 머릿속에서 천천히 돌아갔다. 손을 잡고 젊은 연인들처럼 광장에서 오래 키스를 했던 곳, 도심의 네온 사이로 솟아난 달을 보고 소원을 빌던 곳, 오직 사랑만 했던 곳, 나의 사랑 밀라노.

 

한국에 돌아온 후로 나는 깊은 병이 들었다. 그 병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렇게 단 한 번 내게 다가온 인연은 나의 것이 될 수 없었다. 나는 발가벗은 몸 위에 손을 얹고 밤마다 그를 그리워했다. 그에 대한 그리움은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았다. 의 모든 것이 내 감각 속에 그대로 살아있었다. 몸은 정직하게 그와 같이 했던 시간의 흥분을 기억하고 당장 눈을 감기만 하면 그 생생한 기운을 내 안에 되살려 놓았다. 그의 피부의 정결한 감촉과 향기가 내 안에서 숨을 쉬었다. 비밀의 미궁으로 마냥 빨려 들어가는 미끄럽고 간지럽고 스멀하고 미치게 흥분되는 그 느낌. 가슴과 팔을 뒤덮은 그의 털이, 그의 가슴에 묻은 내 얼굴을 자극하던 그 느낌이 그대로 세포 마디 마디에서 생생하게 살아났다.

 

한 동안 나는 전화기를 보면 저절로 손이 갔다. 분위기 좋은 장소에 가면 그와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영화를 봐도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들에 넋을 빼앗겼다. 미술관에 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녀의 열정이 돋보이는 그림들에 내 눈은 고정되었다. 남자의 나체상을 보면 그의 어깨선이, 배가, 성기가, 특히 허리에서 은밀한 곳으로 이어지는 날렵한 곡선이 눈에 밟혔다. 그의 목덜미와 함께 서혜부 곡선은 내가 가장 애무를 즐기던 곳이었다. 나는 여전히 상상 속에서 언제나 그를 욕망했고, 해가 지는 저녁이나, 달이 뜨는 밤이면 와인 한 잔을 들고 베란다에 나가 앉아 하염없이 그를 그리워했다. 그리움은 끔찍한 통증이었다. 우두커니 허공을 올려다보며 내가 살아있는건지 죽어있는건지 알 수도 없는 시간들을 견디는 건 너무 가혹했고 힘이 들었다. 그렇게는 살 수 없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를 잊어야 했다.

 

 

편지

 

2008 8

 

룩셈부르크에서 엽서가 왔다. 그의 이름을 보는 순간, 내 손에 잠시 경련이 일었다. 벌써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는 고향 룩셈부르크에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그곳 도시를 떠도는 내 환영에 잡혀 갑자기 내게 편지를 쓴다고 했다. 아니 갑자기는 아닐 것이다. 그나 나나 연락은 없었지만 하루도 서로를 생각하지 않은 날은 없었을테니까. 우연히 말해주었던 내 생일을 기억하고 그는 붉은 크리스털 용기에 담긴 향수를 생일선물로 함께 보내왔다. 룩셈부르크의 이모 저모를 담은 각기 다른 그림 엽서 6장에는 그의 마음이 담긴 손 글씨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

 

 

이 순간 한 자 한 자 공들여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내가 이렇게 손으로 직접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어떤 힘에 이끌려서입니다. 갑작스런 편지에 놀라지는 않을 거라 믿어요. 나나 당신이나 우리가 서로를 잊은 적은 없을 거라는 걸 나는 믿고 또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룩셈부르크에서 가장 고급스런 한 호텔의 바에 앉아 있습니다. 룩셈부르크에 오면 이따금 들러 한 잔 하는 곳이지요. 지금 이곳은 아주 조용합니다. , 이 말을 마치자마자 청소부 아주머니의 진공청소기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는군요. 내가 이곳, 나의 고향(home)에 온 것은 오늘이 3일째입니다. 아니 이제 이곳은 나의 고향이 아닙니다. 이곳에서조차 나는 고향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니 그 어느 곳에서도요. 어떤 곳은 더 내 맘을 끌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서 고향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제 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고향을 느낄 수 없습니다. 내가 태어난 룩셈부르크도, 내가 사는 스웨덴에서도요. 단지 한 곳, 내 마음이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곳은 알고 있지요. 그건 너무나 분명해요.

 

그래도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여러 면에서 사랑스런 곳입니다. 완만한 곡선의 느낌을 주는 풍경들과, 많이 파괴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건재하는 멋진 중세의 성들과, 섬세하게 미각을 자극하는 훌륭한 음식들이 이 곳의 매력을 더하지요. 나는 이곳에서 아버지 집에 머물고 있어요.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 젊은 여인과 새로 결혼을 했지요. 둘은 아주 잘 지내고 있답니다. 아버지와 그녀를 데리고 룩셈부르크를 산책하며 당신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 손을 잡고 이곳 저곳 함께 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줄곧 그 생각만 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자라 고등학교까지 다녔고 풋내나는 첫 사랑의 추억도 이곳에 묻어 두었습니다.

 

당신을 알고 난 뒤부터 나의 생각들은 자주 허공을 떠다닙니다. 나는 당신이 왜 이렇게 나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생각하곤 합니다. 당신을 만난 후 나는 색다른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처음 정착해 오스트리아에서 살 때 내 세계는 조각조각 부서져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로, 한 여인의 남편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위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냈을 뿐입니다. , 어떻게 하면 그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우아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 당시 나의 외적인 세계(external world)는 변함없이 흘러가는 것 같았지만 내면의 세계(internal world)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내가 고심하는 문제에 대해 누구의 지지도 받을 수 없는, 한없이 초라하고 외로운 시간들이었지요.(아마 이 이야긴 얼핏 전에도 당신에게 한 것 같군요.) 그 때 당신이 내 인생에 등장한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내 내면의 세계가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당신은 내게 굳게 닫혔던 문의 돌쩌귀 같은 존재였지요. 덕분에 어둡기만 하던 내 세계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왔습니다. 당신의 존재는 내게는 예정되지 않은 일이었지만, 당신은 어쩌면 예정에 따라 내 인생에 와준 천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당신은 너무 멀리 있어서 내 손에 잡히지 않지만 당신에 대한 나의 생각은 늘 한 길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생각들을 굳이 잡아두려 하지 않고 나는 내 생각들을 따라 정직하게 여기까지 흘러왔습니다. 그 생각들이 어느 곳을 향해 달려갈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신 마음이 나의 깊은 곳에 닿은 순간부터 나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번 내 안에 닿은 그대의 마음을 나는 굳건히 잡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껏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당신도 인정했듯이 우리는 본능적으로 서로가 같은 부류의 사람이란 걸 알아보았지요. 말이 다른 우리가 서로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그렇게 깊이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삶은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내부 구조가 단순해 삶에 그다지 의문을 던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삶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시간 경과에 따라 사진첩에 사진을 하나씩 끼워 넣는 일이 그들에겐 인생일테니까요. 나에게는 언제나 인생이 쉬운 주제가 아닙니다.(이 대목에서 저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리고 생각에 잠깐 잠겨보았습니다.) 어떤 점에서 나란 사람은 더 큰 어떤 존재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차르트 소나타의 한 음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요 당신도 말했었지요. 그건 믿음의 문제이고, 증명이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신앙 그 자체를 두고 말한다면 나는 이전에 비해 의심이 많아졌습니다. 내게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나는 모호함에 그냥 문을 열어두기로 했습니다. 아마도 이 문제는 내 인생에 다가온 그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내 고민의 반영일 겁니다
 

설령 어떤 암시가 없었더라도 당신을 만난 건 분명 내 인생에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대는 분명 나에게 사건이었고, 나는 그것에 이미 일대의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래요. 아주 잠시지만(40년 나의 인생에 비하면 그대와 두 번, 함께 보낸 며칠의 시간은 너무도 짧지요) 그 때 깊게 깊게 흠향한 그대의 향취와 맛과 촉감과 느낌은 나의 인생을 완전하게 채워주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내게 맞는 사람인지, 그리고 나 역시 그대에게 얼마나 그런 사람인지 서로 알게 된 시간이었지요.(kind of finding out how you fit into my life, and how I might fit into yours) 두 번째 만났을 때 그 때는 당신은 이미 내 운명이 되어있었습니다.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면(내 마음이 오로지 갈망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입니다) 아마도 그때는 이런 이야기를 좀 더 진지하게 나누어야 될지 모르겠어요. 고백하건대 나는 당신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답니다. 내가 믿는 신을 배반하면서라도 당신을 얻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늘 그 생각만 했답니다. 

 

, 같이 보낸 선물은 이 편지 읽기 전에 열어보았나요? 비록 지나가긴 했지만, 당신 생일날 당신을 생각하며 고른 것입니다. 나는 그대 생일을 기억하는데, 당신은 내 생일을 아마도 잊었겠지요? 향수는 남자들이 여자에게 선물하는 가장 흔한 것이지만, 향수만큼 전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담을 수 있는 선물도 흔치 않을 겁니다. 그 향수는 열대의 밤, 혹은 열대의 밤의 천사라고 불리는 북구 유럽의 향수입니다. 아마도 긴 겨울을 웅크리며 보내는 북구 사람들은 열대의 향취를 그리워하며 그 향수를 만들었겠지요. 당신이 그 향수를 뿌리고 내 앞에 서 있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편지를 이제 접어야 한다니, 갑자기 당신과 연결되었던 끈을 끊어야 하는 것처럼 암담한 기분이 듭니다. 그렇지만 한 편 이 순간 매우 특별한 감정이 저를 감쌉니다.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그러나 가장 지극한 열정을 담아 당신의 전 존재를 향해 키스를 바칩니다. 알아요 당신? 당신은 이미 내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편지가 당신 마음을 고통스럽게 휘젓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나는 우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말했지요. 우연이 때로는 최상의 전략이라고요. 그래요 나는 지금 다시 한 번 그 멋진 전략에 우리의 운명을 맡깁니다. 그리고 그때는 우리가 다시는 헤어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지금 내 손으로 만지고 있는 이 엽서들이 곧 당신의 손에 닿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떨립니다. 당신에게 닿기 전에, 이 엽서에 지금부터 내가 해 둘 일이 무엇인지 당신은 잘 알고 있겠지요.

 

2008 8 3

룩셈부르크에서

당신의 친구 르노 파발디
IP *.51.21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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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8.11.01 12:49:59 *.88.56.230


당신이 얼마나 내게 맞는 사람인지, 그리고 나 역시 그대에게 얼마나 그런 사람인지 서로 알게 된 시간이었지요.(
kind of finding out how you fit into my life, and how I might fit into yours)


한글로 먼저 쓰여졌다기보다 번역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위 문장 때문에,
적어도 50%의 사실에 근거한 글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군요.

님의 실험정신과 에너지에 경의를 표합니다.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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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8.11.02 00:17:50 *.131.127.69

  문득,  카타르시스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문학이 인간에게 긍정적인 것은 현실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을 견디게 해 주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과  상상을 혼합하여  충동과 절제 사이의 경계선에서의 언어적 유희는...  
   그 가상의 공간과 시간의 경험을 통해 실재할 수 없는 체험을
  지각하게 하고 억압된 욕망들을 정화해 줍니다. 

  그래서 누군가 그러기를  문학은, 예술은 본질적으로 불온하다 하고 그랬을까요?
  저는 덧 붙여서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진짜 불온한 사람은 불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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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2008.11.03 15:55:52 *.51.218.189

소설이 가장 자유로운 장르라는 사부님의 격려에 힘입어 역량도 안되는 일을 실험이랍시고 해놓고 머리카락이 뭉텅 빠졌습니다. 제 상상력의 한계를 실감하는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습니다. 꼬박 3일을 바쳐 썼습니다.
그런데 '실험'이라는 단어가 주는 매력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힘든 걸 어떻게 계속 해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됩니다. 이 글은 대단히  경계가 모호해서 소설이냐 아니냐 의견이 분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필자의 경험이 어느정도 녹아있냐고 묻지는 마십시오. 소설은 경험의 재료를 가지고 쓰기도 하지만 또 경험을 꼭 의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글을 쓰면서 스토리텔링이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자신의 역량은 계속 의심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빙자하여 사람들의 다양한 얼굴들을 잘 그려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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