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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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나, <당신은 누구입니까?>
Q: 당신은 누구입니까?
A: 나는 단지 나 자신이다. 예언자도, 메시아도, 예수도 아니다. 단지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 바로 그대와 같은 인간이다.
- 오쇼 라즈니쉬 Osho Rajneesh, 로베르타 그린(Roberta Green)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가끔 처음 참석하는 자리에 가면 자기소개를 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그 자리가 여러사람이 모이는 모임이거나 다른 공식적인 자리라면 정식으로 자기 자신을 소개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자리에서 각자가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름을 말하고, 나이를 말하고, 직업을 말하고, 어떤 이는 사는 동네, 고향을 말한다. 그리고 거기 참석하게 된 이유 등을 덧붙이고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등, 만나서 반갑다는 등의 이야기로 마무리 하는 것이 대분이다. 언젠가 그룹코칭을 시작한 첫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모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뭐라고 소개할까 궁금해 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해주시겠어요?"라고 말하고는 한 사람씩 소개를 들어보았다. 그 들 중 누구 한명은 좀 색다른 소개를 해주길 내심 바랬었는데, 역시나 다들 소개가 거기서 거기였다. 난 물었다. "OOO님, 당신의 이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직업이 당신입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직업을 찾는데 왠 뜬금없는 질문이냐고? 이 질문은 당신의 존재를 묻는 질문이다.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어렵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다. 지금 당장 답을 할 수 없어도 좋다. 사실 이런 질문에 곧 바로 멋들어진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날 그 자리에서도 나는 다시 요청을 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소개해 달라고" 사람들은 모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당황스런 얼굴빛들이 역력했다. 나의 존재는 최지환입니다. 나의 존재는 코치입니다. 나의 존재는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소개가 어색하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다시 각자 소개를 시작했다. 그때는 조금 더 괜찮은 소개를 들을 수 있었다. 자기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인지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물론 시간이 더 있었다면 더 깊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도 훨씬 멋진 소개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꼭 철학자들만이 던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인생은 진정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성공이란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지금 당장 답할 수 없어도, 가슴 속에 이 질문을 품길 바란다.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를 찾아가는 기간만큼은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
자신의 정체성을 갖지 못했을 때 우리는 방황하기 쉽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우리의 역할과 우리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로 살아가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대로, 자신의 존재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영화 속에는 자신의 얼굴이 아닌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많은 영웅들을 볼 수 있다. 스파이더맨, 배트맨과 같이 주로 가면을 쓰고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야 하는 영웅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우리 역시 이들처럼 특수제작된 가면은 아니지만, 모두들 몇 개씩의 가면을 쓰며 살아간다. 사실 우리는 직장의 직원이고, 남편이거나 아내이고, 아들이거나 딸이고, 아버지이거나 엄마이다. 그 가면들을 다 벗고나면 우리에겐 어떤 우리가 남는가? 그것이 바로 진짜 당신일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참으로 거창하고 멋진 대답을 한 사람이 있다. 그의 대답을 한번 들어보자.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종교의 시작은 아니다.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어떠한 경계도 모르는,
오직 영혼의 자유만을,
오직 그대 존재의 침묵만을,
오직 그대 잠재력의 성장만을,
그대 밖의 신이 아닌 오직 그대 자신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신성(神性)만을,
그대 안에 존재하는 그 신성의 경험만을 아는
나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성(religioness)의 시작이다.
- <오쇼라즈니쉬 자서전>중에서 오쇼, 자신에 대한 정의
질문 둘, <당신을 동물로 표현한다면? 그 이유는?>
동물들은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잘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것이 명확히 구분된다. 그래서 강점 약점을 파악하기 쉽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강점은 최대한 이용하고 약점은 보완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체기관도 그렇게 발달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은 좀 더 복잡하다. 인간의 능력은 단지 신체의 생김새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에겐 본인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잠재력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평생토록 그런 능력을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한다. 또 기질도 복잡하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도통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속이다.
우리 인간들은 동물들을 관찰하여 동물들의 특징을 잡아내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특징들을 뽑아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별명을 붙여주기도 한다. 개미는 부지런하다. 베짱이는 게으름을 피운다. 아마도 어릴 때 봤던 동화 '개미와 베짱이' 때문일 것이다. 목소리가 고운 사람을 꾀꼬리 같다하고, 꾀가 많은 사람은 여우같다 한다. 잘 잊어먹는 사람에겐 까마귀 고기를 먹었냐고 하고, 미련한 사람에겐 곰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자식들은 토끼같으며, 마누라는 여우같다. 느려터진 사람은 굼벵이이고 재주가 많은 사람은 원숭이다.
순한 사람은 양이다. 성질이 더러운 사람을 개라 한다. 먹을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돼지이고, 심술맞은 사람은 청개구리이다. 이쪽저쪽 붙는 사람은 박쥐라고 하고, 입이 싼 사람을 촉새라 한다.
당신은 동물로 표현한다면 어떤 동물인가?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의 특징을 콕 짚어 찾아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