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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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반 동안 운영해온 독서/영화 토론 단톡방에서 정모를 했습니다. 예산이 빡빡해서 집에서 공수 가능한 물건들을 캐리어에 담고 근처 마트에서 10인분 장을 보고 택시를 타고 먼저 가서 세팅하는 과정은 솔직히 힘들었지만 밤새 이야기도 하고 게임도 하며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전 이 단톡방이 참 재밌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배경도 모르는 사람들이 가족이나 오랜 친구보다도 더 자주 자신을 공유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타인이고 무해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마음과 입의 빗장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이런 익명성을 악용하여 스토킹을 하거나 괴롭히는 사건도 많이 발생하고 있어서 운영을 빡빡하게 하는 편입니다. 다짜고짜 논쟁만을 위한 질문을 던지거나 누군가를 상처 입히거나 연락처를 집요하게 캐거나 토론방인데 토론 참여를 한 분기 동안 한 번도 안 하면 내보내기 됩니다. 가끔 너무 엄격한가 싶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알고 지낼 사람들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온라인 공간도 만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잘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나를 몰라도 누군가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발견은 저를 바꿔놓았고 내향형이지만 이 사람들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게 지난 주말이었던 것입니다!
멀리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있었고, 좋아하는 와인이나 디저트를 가져온 사람들도 있고 연습장에 함께할 게임을 빽빽하게 적어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와 함께 방을 운영 중인 부방장은 멋진 가랜드와 기념품을 가져와서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모두 2년 반 동안 이야기 나누고 책과 영화를 함께 봤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참 궁금했구나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빔프로젝터에 지브리 애니를 틀어놓고 둘러앉아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을 소개하고 원하는 사람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하는 코너도 마련했는데 예상보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책이 많이 나와서 흥미롭고 즐거웠습니다.
사실 저는 이미 이런 분위기의 모임을 알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변경연에서 지켜봐왔고, 변경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안온하고 즐거운 기분을 저는 어딘가에서 또 만들고 싶다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런 보금자리 같은 사람들과 마음의 공간이 필요한 걸지도 모릅니다.
익명의 친구가 실친이 되면서 느껴지는 감동과 희열을 오래 만끽하고 싶어서 아마 당분간은 좀 더 방을 운영할 것 같네요. 다음 정모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책과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번 냥냥 동네 책방을 방문해 보세요:) 잘 맞지 않는다면 스쳐 지나가면 되지만 혹시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