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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9일 22시 24분 등록


어린이 도서관의 넓은 통유리로 내다보이는 작은 공원은 단풍이 한창이다. 어른 손바닥 두세 개 크기의 활엽수는 은행나무처럼 샛노란 빛이 가득하고 키 작은 단풍나무는 새빨간 잎을 가득 몸에 두르고 도서관 안이 궁금한 듯이 창문을 들여다본다. 넓은 창문 앞에 주저앉아 책을 몇 페이지 넘기다가 창밖을 내다본다. 단풍이 눈을 가득 채워온다. 책으로 고개를 돌려 몇 페이지를 읽어보지만 어느 새 눈은 창밖을 향해있다. 단풍이 보기 좋다.
눈이 자꾸 창밖으로 돌아가는 것은 책이 재미없어서도, 단풍이 좋아서도 아니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많은 게 혼란스러운 까닭이다. 아이는 책상에서 수학문제를 푸느라 정신이 없다. 수학이라고 하지만 정작 문제는 수학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곱셈, 나눗셈이다. 두 자릿수와 세 자릿수가 섞인 곱셈과 나눗셈이 아이에게는 풀기 어려운 문제다.

책을 접어 내려놓고 문을 나선다. 작은 구름다리를 건너면 바로 공원이다. 잠시 벤치에 앉았다가 단풍나무 아래를 거닌다. 잔디밭도 단풍나무 아래 계단도 정겹다. 천천히 이리저리로 발길을 옮긴다. 작은 공원이다 보니 그 자리를 계속 돌고 또 돈다. 아이는 도서관에서 수학문제를 푸느라 여전히 끙끙거리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수학은 항상 가장 어려운 과목이었다. 인수분해까지는 그럭저럭 해냈던가? 어디까지 했는지 마저도 기억이 거의 없다. 그 다음부터는 정신없이 헤매고 다녔다. 워낙 수학을 못하니 흥미가 생길 리 없었고 흥미가 없으니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악순환이 계속되고 공부는 전혀 발전이 없었다. 어떻게든지 피해가려고만 했다.
그래도 남들이 다 한권씩 들고 다니는 그 유명한 ‘수학의 정석’을 샀다. 기를 쓰고 조금씩 공부를 해 나갔는데 미적분에서 꽉 막혔다. 무슨 소리인지 무얼 하자는 건지 무얼 해야 하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붓’을 꺾었다. 더 이상 수학공부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니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전혀 알지를 못하니 공부를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긴 미적분만이 아니었다. 그 앞에서부터 제대로 풀어내는 문제가 없었다. 그게 미적분이라는 곳에서 아예 막혀버렸을 뿐이었다.

수학은 지금까지 가장 어려운 공부였다. 그렇지만 사는데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대학을 간다는 보장도 없었기에 수학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설사 대학을 간다고 해도 이과대학을 갈 것도 아니었고 사회에 나가서는 거스름돈만 제대로 챙겨 받으면 될 터이니 수학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어찌 진학을 하고 대학공부를 시작했다. 교양과목에서도 수학은 피해서 들었다. 전공학과를 결정할 때 수학이 문제가 되기는 했다. 학과별 책을 미리 살펴보니 4개의 전공학과 중에서 3개의 학과는 무지막지한 수식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수식이었다. 그 학과를 택하면 졸업도 못할 것 같았다. 나머지 1개의 전공을 택했다. 선택한 전공은 적성에 맞아서 금상첨화였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그 꼴이었다. 역시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길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생각지 못한 큰 위기가 곧 찾아왔다. 수강신청을 하다보니 피해갈 수 없는 전공과목 하나가 수식으로 가득 찬 내용이었다. 그래프와 수식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말고사가 닥쳐왔다. 이걸 어찌하나. 고민을 하던 끝에 하나의 방법을 찾았다. 시험범위를 통째로 외워버리기로 했다. 책에 써있는 내용부터 그래프와 수식까지 외워버렸다. 외운 대로 답안지를 채웠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랐지만 시험은 훌륭히 치렀다. 성적도 아주 좋게 받았다. 수학 공부를 시작한 이래 가장 어려웠던 순간이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수학만큼 어려운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어려운 문제를 풀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대로 수학문제를 풀라고 시키는 사람은 없었다. 수학은 어디에도 쓰이지 않았다. 자연스레 삶에서 어려운 문제가 사라진 셈이었다. 수학처럼 어려운 문제가 없는 세상은 그럭저럭 살만했다. 그래서였을까. 오랜 시간동안 방심하고 살았다. 방심하고 산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여태까지 거스름돈을 크게 잘못 받은 적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며칠 전 신문 스크랩을 들춰보다가 7080들이 만든 밴드 기사를 보았다. 40대 초반에서 50대 초반까지의 사람들이 만든, 실력은 조금 떨어져도 열정과 기쁨은 프로 못지않은 아마추어들이다. ‘돌아보면 청춘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애들은 어느새 자라 아빠를 서먹하게 여기더라’는 아빠들이 모여서 밴드를 만들었다. 어깨가 축 처진 아빠들을 위한 공연을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무료 공연도 하고 정기 공연도 열었다. 그들은 그렇게 중년이라는 시간을 살아나갔다. 자신들의 아버지 세대를 위한 이벤트도 함께 했다. 그 이벤트에서 글을 낭독하기도 했다. ‘멀게만 느껴졌던 당신, 그러나 나도 아빠가 된 이젠 당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쓸쓸한 이름 아버지’라는 슬로건으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무슨 말이 하고 싶어 밴드를 만들고 세상을 향해 소리높이 외쳤을까? 그들은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한 무슨 말이 있어 대신 기타와 드럼을 두들겼을까? 그 외침과 두드림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맘껏 외쳤을까? 그래서 그들은 속이 시원해졌을까? 그 외침이, 드럼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 소리에는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함께 들어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중년과 아빠와 아버지라는 문제는 어려운 문제였을까, 쉽고 간단한 문제였을까. 그렇게 어렵던 수학 문제처럼 공식대로 풀어 가면 답이 딱 부러지게 나오는 그런 문제였을까, 아니면 절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 같은 문제였을까. 어떤 문제였든 그들은 답을 찾아냈을까?

중년이라는 삶이, 아빠라는 자리가, 남편이라는 좌석이, 수학처럼 딱 부러지는 답이 나오는 문제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다시 수학공부를 시작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공부를 할 것이다. 그 어려운 ‘수학의 정석’을 샅샅이 풀어낼 자신도 있다. 풀리지 않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공부를 할 것이고, 그래도 안 되면 책을 아주 외워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중에 ‘수학공부가 제일 쉬웠어욧’이라는 제목의 책을 쓸 의향도 있다.
아쉽게도 그 문제는 어떤 공식으로도 답을 찾아낼 수 없다. 답이 없기에 수억 가지 수십억 가지의 답이 쏟아져 나온다. 자기 나름대로의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은 문제의 답 역시 나름대로 만들어낸다. 답안의 숫자만큼이나 답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역시 숱하게 많다. 답을 찾지 못한 이들은 문제만 끌어안고 살아간다.

아마추어 밴드는 모이면 술 마시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기에 “사는 게 뭔지”라는 미몽에 휩싸여 있다가 “내 소중한 꿈을 위해서” 노래를 시작했다. 그들에게 외침과 두드림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져 가는 자신들을 향한 외침이며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소리일 것이다. 그들도 답을 찾지 못했기에 소리를 내질렀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은 작은 꿈을 만들고 이루었다.
남자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가슴 속에 피터팬이 살고 있다. 그리고 때때로 피터팬이 되고 싶어 한다. 원하지 않았지만 덮어 쓴 어른의 탈을 벗어버리고 피터팬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가슴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그것은 답을 풀지 못한 어른들의 비겁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이루지 못한 꿈을 향한 발버둥일 수도 있다. 남자들은 그렇게 꿈과 현실사이를 거닌다.

노랗고 붉은 단풍나무가 서있는 공원은 먹구름 낀 하늘아래서도 공원을 환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단풍은 머리 위에서 노랗고 붉게 타면서 고개를 들 때마다 밝게 웃어주었다. 마주보며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수학문제보다 몇 백배는 어려운 문제들이 한꺼번에 눈앞에 펼쳐진 탓이었다.
피터팬을 불러올까. 내 가슴 속의 피터팬은 어떤 모습일까. 가슴 속 피터팬의 모습대로 살 수 있을까. 피터팬은 어떤 문제라도 풀어내는 수학의 도사일까?

IP *.163.6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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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11.11 17:11:08 *.97.37.242

수학처럼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는 세상은 책에서만 볼 수 있는 세상 아니겠나?
아마추어 밴드가 공연을 하면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거고,
연구원 생활을 하는 사람은 책읽고 글쓰며 그렇게 사는거고.
뭐든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걸 하면서 그냥 사는 거지, 거기에 무슨 대단한 이치가 있겠는가?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밥을 먹고 있으니 밥 값은 해야겠기에...
고능선 선생은 김구선생에게 이렇게 가르쳤다지.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得樹攀枝無足奇)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懸崖撤手丈夫兒)

책 읽기 좋은 가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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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2 11:06:07 *.64.21.2
형님, 갈수록 폼이 나는것 같습니다^^
댓글도 멋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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