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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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경치를 보는 것 이상이다.
여행은 깊고 변함없이 흘러가는
생활에 대한 생각의 변화이다.
-미리엄 브레드
어제 저녁 사흘간의 남해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바쁜 일상과 업무의 틈새에서 억지로 쥐어짜낸 시간이라 그런지 더욱 달콤했던 여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 날씨도 참 좋았습니다. 남해 보리암에서 내려다본 절경은 장관이었습니다. 험한 산세가 바다에 펼쳐져 있는 모습을 산 정상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홀로 기개가 웅장해지더군요.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법정스님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가을은 잎이 가지를 떠나고, 열매가 나무를 떠나는 계절이라고요. 마찬가지로 사람이 길을 떠나고 싶은 계절이 가을입니다. 법정스님은 가을은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계절이라며,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기보다는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그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셨죠. 한려수도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으니 일상의 굴레를 벗어난 느낌이였습니다.
아, 그런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더군요.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회사일에 문제가 있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왜 하필 그 놈의 이슈는 이럴 때 터지는 것인지 절경을 보며 자연으로 귀의했던 마음이 바쁜 도시로 돌아가는 것은 순간이었습니다. 급한대로 전화와 메신저를 붙들고 제가 할 수 있는 업무들에 대해 처리를 했습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했어도 미적지근한 마음은 가시지 않더군요. 가족들과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도, 빼어난 경치를 보면서도 머릿속에는 일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을지 자꾸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자꾸 메신저와 메일을 들여다보게 되고요. 그런 제 모습을 보던 초등학생 딸아이가 한마디 하더군요.
"아빠는 여기 와서도 일해? 밥 먹을 땐 밥 먹어~ 그냥~"
아... 밥 먹을 때는 그냥 밥 먹으면 되는데... 이 단순한 걸 여행 와서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쁜 일상 중 짧은 일탈로는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몸은 여행지에 있어도 마음은 일상에 두고 오거나 왔다갔다 하는게 보통의 여행입니다. 그래서 여행기간은 길면 길수록 좋은 거죠. 여행을 온전히 즐기지 못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를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짧은 여행은 단순한 일탈에 불과하다는 것을 떠나기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지에 있어도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을 미리 걱정합니다. 몸은 현재에 있지만, 마음은 오지 않은 미래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행의 순간순간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며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미래의 두려움 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움켜쥐려고 애쓰지만 행복이란 녀석은 모래처럼 부드럽게 움켜쥔 손아귀를 빠져나갑니다. 법정스님은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이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사실 여행의 참 묘미는 자신을 더 차분히 지켜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는 것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 있을수록 자신은 더 잘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자신과 조우하는 기회를 많이 만들수록 더욱 자신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되고, 스스로와 더불어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깨닫게 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풍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데 있다고 말했는데, 이 '새로운 눈'이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자기자신의 내면이겠지요.
<한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사람을>에서 법정스님이 여행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으로 오늘 편지를 마칩니다. 오늘은 법정스님의 말씀을 많이 전하게 되네요. 떠나고 있는 낙엽의 계절을 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비본질적인 일상이 아닌 본질에 충만한 하루하루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 그런 의미에서 여행이 필요합니다.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집을 떠났다가 언젠가는 영영 그 집으로 돌아오지 못 할 날이 올 것입니다. 도중에 마주치는 어떤 사건 사고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따라서 여행을 통해 비본질적으로 일상적인 삶을 주기적으로 털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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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냥 '같은 것은 없다, 단지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상대선수 뿐만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것 상대적인 움직임의 모든 것은 일회적인 것이다. 단지 그 범주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
주기를 가지고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반복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들여다 본다면 그것들은 같지 않습니다. 저는 그냥 일회성의 원리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어느 스님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그래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 상대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생각하면 그 생각에 쫓기게 된다. 그냥 긴장하라. 너희가 익히고 준비한 것들이 발휘되어 질 수 있도록 ,,, '
산속에서도 마음이 세상사에 갇히면 헛된 것이고 세상 속에 일상을 살아도 삶으로부터 자유로우면 마음이 비워지고 새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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