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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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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0일 16시 40분 등록

니체는<즐거운 지식>에서 이렇게 묻는다.

"
만약 당신이 밤에 혼자 있을 때, 악마가 나타나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당신의 인생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어떤 가감도 없이 모든 고통과 기쁨마저도 똑 같고 심지어 크고 작은 사건까지도 똑같이 일어나는 인생이 반복된다면? 그럴 경우, 우리는 어떨게 할 것인가? 절망에 빠져 울 것인가. 아니면 정말 좋은 일이라고 감격할 것인가
.

이런 가정적인 이야기는 니체의 영원회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무엇이든 일어난 일은 이미 과거에도 수없이 똑같이 일어났고 앞으로도 영원히 똑같이 일어날 것임을 뜻한다. 즉 우리는 과거에 이미 현재의 삶을 무수히 살았고, 미래에도 수없이 같은 생을 살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영원회귀에 대한 개념은 입증된 진리라기 보다는 ‘사고 실험을 위한 하나의 가설’이다
.

내 경우로 돌아가 본다. 어떤 가감도 없이 내가 지금까지 산 인생이 반복된다면, 크고 작은 사건까지 똑같이 반복된다면, , 그것도 이 생에서만이 아니고 다시 미래에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0.1초 만에 답이 튀어나온다. 그건 절망이다. 통곡하고 또 통곡할 일이다. 이 생뿐이라면,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만 이라면, 뭘 모르고 당하면서 비싼 수업료를 치렀다고 위로할 수 있다. 그 다음 생에 혹은 남은 생에 그 삶을 보상받을 기회가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까지의 내 힘든 인생(지금까지의 인생)이 다시 반복된다면 그건 정말 no thanks
.

이 시점에서 내가 인생을 돌아보며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직 기회가 내 앞에 남아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기회도 없이 내 인생은 운명지어진 것이고 내가 노력하고 노력하지 않은 것 역시 예정된 일이며, 그런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태어난 것을 결코 축복할 수 없으리라
.

작년과 올해 다른 때보다 조금 더 내 삶을 되돌아볼 시간을 가졌다. 그런 시간을 통해 나는 힘들었던 일까지 ‘일어날 일들이 일어난 것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였고, 정리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힘겨운 인생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이 강팍해지지 않은 것은 미래를 긍정할 힘이 내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긍정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창조적 혐오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만약 나의 의지는 싹둑 잘려나간 채, 앞으로도 똑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는 이 가설이 진실일 수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살아온 삶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것과 그 삶을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

내게도 돌아보면 좋은 일이 많았다. 그러나 좋은 일보다 힘든 일이 더 많았고, 납득할 수 있는 일보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았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도 있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일은 더 많았다. 결혼 이후엔 더 그랬다. 나만 통제하고 살면 되던 단일의 관계 구조가 갑자기 복합 관계 구조로 재편되면서,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완전히 실종되었고 그 자리에 새로운 관계가 요구하는 수많은 의무와 책임들이 들어섰다. 나는 그저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직장인으로 다중의 책무와 함께 힘겨운 시간들을 감당하기에 바빴다
.

미리 청사진을 펼쳐 보이며 ‘네 결혼 생활이 이렇게 전개될 거야’ 라고 말해준다면 과감히결혼을 선택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앞 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에, 모르는 채 당하는 것이 인생이기에, 거기에 장미빛 환상까지 양념으로 얹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길을 기대를 가지고 끝까지 걸아가보는 것이다. 결혼 보다 더 우리 인간을 배신하는 것이 있는가. 암튼 내 경우에는 결혼은 장미빛 환상으로 시작해 살벌한 핏빛 현실이 되었다. 끝까지 장미빛이기를 원하는 끈질긴 허영이 내 자신에게 요구한 건 그만큼의 혹독한 희생이었고, 나는 여전사처럼 싸워서 이렇게 씩씩하게 살아남았다. 이런 나의 20년 인생에 사람들은 찬사를 보내주었다. 나 역시, 무척 많은 것을 배우게 한 가혹한 학교였다고 자위하며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밤 중에 악마가 붉은 미소를 지으며 ‘그 삶을 다시 살라’고 한다면, 아니 ‘너의 그 삶은 다시 반복될 거야’ 라고 한다면, , 난 어쩔 것인가. 그건 악몽이다
.

오늘 아침, 이 주제에 대해 끊어졌던 생각을 다시 이으며 갑자기 드는 생각 하나. 그것은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가설이 오히려 삶을 더 잘 살게 만들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예정된 것이라면 우리가 삶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예정에 있는 일일 것이다. 이 말은 가만히 있어도 일어날 것은 일어난다는 말과는 다르다. 좀더 노력해서 앞으로의 인생을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바꾼다면 결과론적으로 볼 때 그것 역시 우리의 운명이고, 그렇게 바꾼 삶은 다시 반복되더라도 좋은 삶이 될 것이다. 그러니 영원회귀라는 개념은 인생을 긍정하고 사랑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만약 오늘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이 행동이 영원히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다면 좀 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힘에의 의지'를 잘 사용하는 사람은 환희에 찬 긍정적인 대답을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정말 원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

써놓고 보니 이런 류의 생각에는 정말 많은 논쟁의 여지가 숨어있다는 걸 느낀다. 논쟁은 내 관심사가 아닐 뿐더러, 어느 특정 논점을 이끌어 갈 만큼 해박한 지식이 내게 있는 것도 아니다. 열심히 오늘을 살아서 내일 조금 더 자유롭게 세상의 공기를 호흡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뭐 그리 복잡한 생각이 필요하겠는가. 미욱한 인간의 머리로 증명해낼 수 없는 것들이 많으니 우리는 신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래서 더 겸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
IP *.51.218.189

프로필 이미지
초아
2008.11.11 23:59:40 *.253.249.77
오랜만에 蘇隱의 글을 읽으니 점점 노련해지는 작문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많이 힘을 뺀 자기성찰도 보인다. 니체의 통서를 보니 오윤양이 생각난다. 영심히 공불 하다가 니체가 그를 어디론가 보이지 않는 여행자로 만들고 만 사실...

자네의 글속에 그대가 가진 얼굴과 몸에서 풍기는 강한 카리스마가 더욱 또렸해 졌으면 하는 건 나의 욕심일까?글귀가 작아지는 것은 나이 때문인지 지쳤기 때문인지 알수가 없구나.

한번 더 열정의 그림자를 피워 올려 보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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