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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6일 21시 30분 등록


퇴근길에 헤어밴드를 샀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따라 걸어오는데 조그만 액세서리 가게 앞 좌판에 헤어밴드가 쌓여 있었다. 가격은 1000원. 맘에 드는 가격이다. 합리적이기도 하다. 선뜻 좌판 앞으로 다가간 것은 거리가 컴컴하게 어두웠다는 시간적 이유도 크게 작용을 했다. 환한 대낮이었다면 자신 있게 헤어밴드 좌판 앞에 서서 물건을 고르지 못했을 게다. 중년의 남자가 좌판에서 헤어밴드를 뒤적이며 고르는 것은 이상한 광경이 될 가능성이 크다. 딸에게 또는 아내에게 주려 한다고 한들 고개를 끄덕일 만한 사유는 되지 않는다. 그러한 풍경 자체가 누구에게나 낯설고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찬찬히 헤어밴드를 골랐다. 날씨는 충분히 어두웠고 주변에는 사람들도 없었다. 이만한 찬스를 잡기가 쉽지 않다. 두꺼운 것에서 얇은 것까지 크기가 각양각색이다. 일단 얇은 것으로 택했다. 두꺼운 것은 머리를 눌러 아플지 모르기 때문이다. 크기를 고르고 나니 다음은 색깔이 문제였다. 무난한 검은색을 골랐다가 와인 색깔이 섞여 있는 것으로 마음을 바꿨다. 이왕 사는 마당에 무난한 것보다는 좀 더 색깔이 나아보이는 것으로 고르기로 했다. 돈을 지불하고 가방에 헤어밴드를 집어넣고는 천천히 걸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다. 가격도 합리적이고 만족도도 높았다. 필요에 있어서도 물론 효용성이 높았다. 집에 도착하면 딸에게 이렇게 말을 해야겠지. “이제 네 것 빌려주지 않아도 돼. 아빠도 좋은 게 생겼거든.”

헤어밴드는 집에서 자판을 두들길 때 주로 쓰는 소품이다. 책을 볼 때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뒹굴뒹굴 할 때 쓰기도 한다. 그런 소품이 왜 필요 하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그냥 자유스러운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그래서 가끔 헤어밴드를 집어 든다고나 할까. 그래도 자꾸 물어본다면 이런 정도의 말은 해줄 수 있다. “책보거나 자판 두들길 때 헤어밴드 해 봤어요?” 물론 당신은 안 해봤다고 할 게 분명하다.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할 생각이다.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별건 아니지만 헤어밴드를 하고 있으면 왠지 자유스러운 기분이 든다. 왜냐고 자꾸 묻지 마라. 그냥 그럴 뿐이다. 보편적으로 헤어밴드는 남자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중년의 남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헤어밴드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예상하지 않는 것을 해보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흘러내리는 머리가 깨끗이 정리되니 편하기도 하고, 무언가 하는 것 같은 괜찮은 기분도 들었다. 거기다 여자들만 한다고 여겨지는 헤어밴드를 하고 있으니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을 벗어난 것 같았다. 자유의 냄새는 거기에서 짙게 풍겼다. 재미가 있었다. 헤어밴드를 하고 자판을 두들기는 중년 남자라니. 그것 참 신나는 일이었다.

출근하지 않는 날이면 모자를 쓰고 다닌지 오래 되었다. 뒷산으로 산책을 가거나 나들이를 갈 때는 물론이고 가까운 곳을 갈 때도 모자를 썼다. 웬만하면 휴일 날에는 모자와 함께했다. 모자는 그리 편한 소품이 아니다. 날이 뜨거운 날 햇볕을 가려주는 데 훌륭한 역할을 하지만 그 외에는 패션이 성격이 강하다. 모자는 오래 쓰고 다니면 머리가 눌려서 짜증이 난다. 더운 날 하루 종일 모자를 쓰면 머리가 아프기도 하다. 그럼에도 살짝이라도 모자를 머리에 얹고 다녔다. 놓치기 싫은 반대급부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모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누군가 모자를 쓰면 어려보인다고 해서였다. 어려 보인다는 말에 혹해서 모자를 한 개 샀다. 인사치레였는데 너무 빠져들었다. 모자를 한개 두개 사서 모으다보니 제법 모자가 많아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정리하고 몇 개의 모자만 남았다. 모자를 쓰면 헤어밴드 할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든다. 무언가 자유스러운 느낌이 생기는 것이다. 친구들 중에도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무슨 모자냐며 핀잔을 주는 친구는 있다. 등산을 간다든지 하기 전에야 중년의 남자가 일 없이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게 그들은 이상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자를 쓰고 다니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모자를 쓰고 다닌다.
친구들에게는 “그냥”이라고 얼버무리고 말지만 그것은 나에게 자유의 아이콘이다. 헤어밴드와 모자는 자유의 기분을 느끼게 만들어 준다.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않는 소품이어서 더 그렇고 마음이 그렇게 느껴져서도 그렇다. 모자와 헤어밴드는 재미와 자유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버리기 아까운 소품이다.

중년이라는 단어는 가운데 중(中)자에 해 년(年)자를 쓴다. 인생의 중간에 해당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년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중년은 중년(中年)이기보다는 중년(重年)으로 느껴진다. 가운데라는 느낌은 간 곳이 없고 무겁기만 하다. 많은 것들이 중년을 죄어온다. 개인의 삶도, 직장도, 심지어 가정까지도 무섭게 죄어 온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번쯤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보고 싶지만, 현실은 발버둥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한번의 단순한 일상탈출 조차도 쉽지가 않다. 꽉 묶여있는 몸은 발버둥을 칠 여력조차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중년은 그냥 살아간다. 가끔은 한숨을 쉬면서, 가끔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방울 눈물도 흘리면서 그냥 살아간다.

개인의 자유라고는 어디에도 없는 공간의 흐름 속에서 자유를 느끼고 싶었다. 공기가 희박한 물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가끔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공기를 맘껏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렇지만 고개를 내밀 공간도 많지가 않았다. 업무 중간에 건물 밖에 나가서 담배 한대 피우는 시간 정도이거나, 퇴근길의 버스이거나, 버스에서 내려서 천천히 걸어오는 시간 정도만이 자유의 공간이었다. 때로 적극적으로 찾아 낸 공간이 있기는 했다. 퇴근 뒤 집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집 뒤의 평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거나, 공원에서 넋을 놓고 앉아있는 시간이 그것이었다. 그것을 자유라고 하기에는 꽤나 서글픈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달콤한 자유의 공간이고 시간이었다.

자유는 달콤하지만 중년에게 있어 자유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자유의 냄새를 맡는 것조차 포기해야 할 것인가. 그 달콤한 자유의 맛을 버려야 하는 것인가. 자신이 중년의 시기에 어떤 자유의 아이콘을 가지고 있는지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가늠해보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술 또는 담배라고 말하지는 마라. 그것들은 자유의 아이콘이 아니라 속박의 대명사이다. 술이라도 또는 담배라도 라고 말하면서 어찌 그것을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음악이라든지, 그림이라든지 하는 고상하고 멋진 것이 아니어도 좋다. 하찮은 것이라도 무엇이 자신에게 자유를 주고 있는지, 무엇으로 자신이 자유를 즐기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조금은 불행한 일이다. 그렇다고 기분 나빠 할 필요는 없다. 여지껏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그런 이유로 또 하나의 불쾌함을 추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방법이니까. 대신에 하나쯤이라도 자신만의 아이콘을 만들겠다는 욕심을 낼 필요는 있다. 자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실제로 자유롭게 해주지는 않지만 그런 느낌을 주는 아이콘 말이다. 그것은 운동이어도 좋고 산책이어도 좋고 취미생활이어도 좋다. 술을 진정 즐길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빨래를 선택한다거나 청소를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정생활도 편해지고 가정에도 유익하다. 물론 스스로 나서서 하고 싶고 자유와 활기를 느낄 수 있다면 말이다. 혼자 숨어서 책읽기를 할 수도 있고, 휴일날 도서관에 처박혀 다양한 책을 섭렵하는 것도 좋다. 방법은 의외로 많고 다양하다. 당신이 생각이 없을 뿐이다.

나는 모자와 헤어밴드를 택했다. 웃긴다고? 웃어도 좋다. 웃거나 말거나 관계없는 일이니까. 휴일 날 모자를 쓰고 나서면 나는 자유를 느낀다. 조금은 젊어진 느낌도 든다. 그래서 기꺼이 모자를 집어 든다. 친구 집을 갈 때도, 회사에 일직 근무를 갈 때도, 뒷산에 산책을 갈 때도, 가끔 교회에 갈 때도, 마트에 갈 때도 나는 모자를 쓴다. 한참 모자를 쓰고 다니다 가끔 모자를 벗어 손가락에 넣고 돌려본다. 재미있다. 모자에 눌린 머리를 쓰다듬어 올려보기도 한다. 머리카락은 뭉개져 보기 흉해졌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자유다. 머리가 뭉쳐져 보기 흉해지거나 머리카락이 떡이 되면 대부분 그것을 펼쳐서 정돈되어 보이게 한다. 그렇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단지 머리가 헝클어졌을 뿐인데. 그럴 수도 있는 일일 뿐인데.
헤어밴드 또한 다르지 않다. 헤어밴드를 하는 중년의 남자가 내가 원한 풍경이었다.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편했다. 그리고 자유의 냄새가 났다. 더 이상 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 이유가 있는데 헤어밴드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세상의 시선은 이상하게 볼지 모르지만 그것은 나하고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 시선이 내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헤어밴드를 하고 출근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유치해지면 작은 자유가 따라온다. 세상의 시선을 벗어던지면 조금 큰 자유가 따라온다. 유치해져라. 충분히 유치해져라. 남들이 웃을 만큼 유치해져라. 세상의 시선을 벗어던져라. 충분할 만큼 세상의 시선을 벗어던져라. 남들이 찡그릴 만큼 세상의 시선을 벗어던져도 좋다. 선뜻 발을 떼기가 어렵다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시작해라. 자유가 거기에 있더라. 소극적인 자유지만 그것도 꽤나 달콤하다. 그 작은 달콤함이라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즐겨라. 누가 가져다주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라. 중년(重年)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때야 눈물로 돌아보았자 남아있는 것은 눈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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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11.17 02:11:12 *.36.210.210

머리를 길러 묶을 날도 얼마 남아 보이지 않는구먼. ㅋㅋㅋ
<헤어밴드의 자유>라는 제목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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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11.17 16:18:32 *.97.37.242
나도 가끔 헤어밴드를 하네.
집사람이 가끔 얼굴 마사지를 해주는데, 그 때 밴드를 하지.
 '조수'라는 직책이 주어진 우리 딸은 스킨으로 마사지 크림을 닦아내는 역할을 하고.
불과 10분 남짓 짧은 시간이지만, 난 그때 자유를 느끼네. 행복이라고 해도 될테고.

헤어밴드. 그거 중년 남자가 해도 괜찮은 거야. 기분 좋거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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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칸양
2008.11.17 18:15:21 *.122.143.151
앗! 집에 가서 마눌님한테 사달라고 해야지...
아님, 이번주 쇼핑가서 삐까뻔쩍한 넘으로 하나 살까나...
근데 사달라고 하면 나 뿐만 아니라 창형, 정산형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쫌 걱정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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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7 20:39:04 *.163.65.53
웬만한 남자들은 다 하는군.
아이템을 바꿔야 겠어, 기분이 안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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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년지혜
2008.11.18 13:01:44 *.251.5.1
하하하하하! 오라버니들 너무 재밌으세요~ 최코치도 하나 사줘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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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
2008.11.18 13:18:16 *.161.251.172
헤어밴드 하나에서도 자유는 그렇게 오는구나^^
앞으론 외출시에도 헤어밴드해봐요.
날게 될런지 모르잖어.
ㅋㅋㅋ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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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11.18 13:36:42 *.244.220.253
책의 컨셉을 '중년'으로 선회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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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de
2008.12.16 11:06:13 *.183.139.48

창.. 선생님의 글. 참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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