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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22일 22시 12분 등록


숨을 깊이 들여 마셨다가 내쉬었다. 크면서 높기까지 한 병원 건물은 육중한 무게로 다가왔다. 다시 숨을 깊이 들여 마셨다가 내쉬었다. 어떤 얼굴로 병실에 들어서야 할까 하는 생각이 발을 선뜻 떼지 못하게 했다. 병실에 누워있을 후배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해야 할까. 심각한 얼굴로 들어서야 할까. 아니면 뭐 그런 일 정도야 하는 표정으로 들어서야 할까. 그런 표정들이 이 상황에 적당하기는 한걸까.
본관 건물로 들어서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도 생각은 반복됐다. 병실에 들어서니 커튼에 가려있는 후배의 침대 끝자락이 보였다. 천천히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후배의 얼굴이 보였다. 침대에 누워있던 후배는 활짝 웃었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덩치가 큰 후배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웃기만 했다. 웃다니. 고맙다. 고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사고가 난 뒤 한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후배는 전신마비였다. 출근 전 수영을 다녔던 후배는 수영장에서 순식간의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었다. 다이빙을 하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치면서 경추가 부러졌다고 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소식을 듣고도 병실을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병실에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어떤 얼굴로 그 녀석을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후배는 수술을 하고 중환자실과 일반병실을 왔다 갔다 했다. 몸은 마비되고 의식은 멀쩡한 상태였다. 병원을 찾았던 사람들은 가지 말라고 했다. 가서 보고 오면 가슴만 아프다는 것이다. 병원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 더 미루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다. 다녀온 사람들 말로는 회복이 빠른 편이라고 했다.

뜻밖에 후배는 활짝 웃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목 위쪽뿐이었다. 폐가 나빠져 목에 구멍을 내고 튜브를 꽂았다. 그런 몸으로 침대에 그저 누워있었다. “야, 얼굴이 말끔해졌네.” 같이 간 일행이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정말 말끔해진 얼굴의 후배가 씩 웃었다. 기분이 좋아보였다. 후배가 누워서 말을 했다. 목에 튜브를 꽂아서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만 벙긋벙긋 한다. 입 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들어야 했다. “팔하고 다리도 움직여.” 자세히 보던 일행이 통역을 한다. 누워서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보여준다. 아주 빠르게 좋아지는 거란다. 왼쪽 팔을 혼자 들어서 보여준다. 왼쪽 다리도 움직여 보인다.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먹고 싶은 거 없느냐고 물으니 술 생각도 나고 담배생각도 난단다. 이번 기회에 담배는 끊을 생각이란다. 같이 웃으며 그런 소리를 했다. 한 시간쯤 몸을 주물러 주다가 병실을 나왔다.

이제 시작일 것이다. 이제 재활병원으로 옮기면 기약도 없는 시간을 지나야 하겠지. 아무 확약도 없는 재활훈련을 해야 하겠지. 그럼에도 녀석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웃음이라니. 더구나 그렇게 활짝 웃는 것은 이전에 본 일이 거의 없었는데. 그런 녀석이 침대에 누워 말 그대로 활짝 웃고 있다. 그 깊은 절망 속에서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보았기에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일까. 한쪽 팔과 다리가 움직인다는 것일까. 의사의 말로는 재활훈련을 하던 사람들이 휠체어를 잡고 일어서는 순간에 더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이해가 된다. 그들에게 그만한 행복이 어디 있을까. 그렇지만 이해가 쉽지는 않다. 그런 상황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말이다. 그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침대에 누워서 활짝 웃는 후배의 웃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행복의 모습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리고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마치 변신로봇처럼  모습도 아주 자주 바뀐다. 자신의 상황에 따라서, 또는 생각에 따라서 언제든지 모습을 바꾼다. 어제는 불행이었던 것이 오늘은 갑자기 행복이 되고, 어제는 행복이었던 것이 오늘은 불행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흔하지 않지만 드문 일은 아니다. 어렵지 않게 겪는 일이다. 그것이 세상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지구상에는 아마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의 수 만큼인 ‘60억 곱하기 수백’ 이상의 모습이 행복으로 존재할 것이다. 후배가 병원 침대에 눕기 전의 행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돈 이었을까. 술이었을까. 가족과의 나들이였을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은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처럼 몸을 움직이는 것, 그것일 것이다. 아니 예전처럼은 아니어도 자신의 힘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겠지. 지금 상황으로는 그것도 너무 거창해 보인다. 스스로 일어나 앉는 것이나 살짝 걸어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할지 모른다. 한쪽 손과 발을 움직이면서 저렇게 환하게 웃는데, 몸을 움직일 수 있다면 얼마나 크게 웃을 것인가. 한 달 전에 그에게 그런 것은 행복이 아니었을 게다. 그러나 예전에 아무 것도 아니었던 일들이 지금은 아주 큰 행복이다.

한 어린이 교양지가 초등학생 4~6학년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48%만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대답했다. 절반이 안돼는 숫자다. 또 40%가 ‘공부를 잘하게 되면’, 25%가 ‘돈이 많으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대답했다. 많은 시간을 살아내고,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고뇌를 거친 어른들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다고 느낄까. 그리고 어떻게 되면 행복해 질것이라고 생각할까. 초등학생 정도는 쉽게 뛰어넘는 인생의 철학이 담긴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무엇이 나를 불행하게 하는지. 왜 내가 행복하지 않은지, 왜 내가 불행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지금이 행복하다면 왜 내가 행복한지를 생각해보자. 행복에 관해서는 아무도 답을 주지 못한다. 결국 내가 만들어갈 수밖에. 답이 나오면 잠깐이라도 답대로 살아보자. 그게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겪다 보면 스스로 알 수 있다. 정답이라면 길지 않은 시간이나마 행복하게 살게 된다. 답이 나오지 않으면 답을 만들기 위한 고민을 해보라. 어느 날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병원에 누워 ‘아, 그게 행복이었구나.’ 하고 알게 된다면 그때는 많이 늦다.

IP *.163.6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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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11.24 16:15:04 *.97.37.242
사소한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동료들과의 한바탕 웃음, 고객의 감사 인사, 내가 봐도 잘 쓰여진 칼럼....  하지만 또 사소한 것에서 짜증을 느끼기도 한다. 갑자기 말안듯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딸아이, 동료와의 예상치 않은 갈등, 불만에 찬 고객의 언행, 시간에 쫓겨서 엉망으로 올린 컬럼..... 

행복과 짜증(이런 내용을 불행이라고 부르기가 좀 뭣하다)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게 우리 인생 아닌가?  하지만 컬럼 내용을 보고 생각하면 사지를 움직이는 것도,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눈으로 자연을 볼 수 있는 것도 다 행복한거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행복해야 할 일이 무지무지 많은 거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난 엄청 행복한 사람이다.(오만의 극치?) 그래도 행복의 파이를 더 키우고 싶다면 많이 웃어라. ㅎㅎㅎㅎ

근데 이 댓글은 전에 써먹었던 래파토리 같다?  창의 칼럼도 그런거 아닌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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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4 20:45:44 *.163.65.103
에구, 리바이벌 아님.
내용 그대로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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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쟁이
2008.11.24 19:23:08 *.129.197.191

이거 딱이네...이건 진짜 잘 팔릴 것 같어 ㅋㅋㅋ
 
그러고 보니 살아있는 게 기적이지 않아요? 손도 움직이고 발도 움직이고 두 눈도 깜빡이고 이렇게 숨도 쉴 수 있으니 얼마나 신기해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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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4 20:52:26 *.163.65.103
"기적을 기뻐해야 하나?" "이게 정말 기적인가?"
그런거 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 하고.
참 헷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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