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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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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24일 12시 00분 등록

 

이른 아침에 조깅을 한다는 그를 만나러 공원으로 갔다. 오래된 공원답게 아름드리나무들, 싸늘한 11월의 공기, 이슬에 젖은 나뭇잎 냄새. 그의 덕분에 하게 된 아침 산책은 싱그러웠다.

 저명인사들을 만날 때는 선심 쓰는 척, 얻어먹는 입장인데, 이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터뷰이에게 밥을 사는 일은 나에게는 답례의 예의와 같은 것이었다.

 그날은 인터뷰를 진행하며 나누던 ‘시천주’의 따듯한 밥상대신 샌드위치, 막 내린 원두커피와 과일 샐러드를 준비해 갔다. 11월초의 날씨는 산책을 하기에도, 아침을 먹기에도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나는 나무 탁자에 돗자리를 깔고 아침 식탁을 간단히 세팅했다. 그리고 약속시간에 정확히 맞춰 온 그를 찬찬히 살폈다. 단단하게 보이는 체구, 피부빛깔도, 표정도 확실히 일 년 전에 시내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라졌다.

국립대 졸업, 49세, 전직 창투사 간부, 현재 영업직, 두 아이의 아빠. 한 여자의 남편. 그의 프로필이었다.

앤: 오랜만이다. 좋아 보인다.

K: 반갑다. 이런 곳에서 만나니 참 좋다. 멋진 식탁이다.

앤: 칭찬 듣고 싶어 가져 온 것이 아니라 공원을 즐기고 싶었다. 예전에 캐나다 살 때 종종 이런 식의 아침을 먹었던 기억이 나서. 어쨌거나 맛이 없어도 맛있게 먹어 달라. 오늘의 주인공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K: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인다. 내가 어디가 좋아 보이나?

앤: 뭐랄까. 다시 예전의 다부진, 강건한 이미지이다. 활기차 보이고, 안정감 있어 보이고. 일단, 피부가 좋아졌다.

K: (웃음) 앤도 좋아 보인다.

앤: 비결이 무엇인가? 오랫동안 K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참 강한 사람이다.

K: 힘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삭히지 못한 분노가 있다. 안 그런 척 지날 뿐이다.

앤: 그래도 암튼 일 년 전에 종로에서 봤을 때 보다 훨씬 좋아 보인다.

보온병에서 커피를 나누자 커피 향과 공원에 온갖 것들의 냄새가 뒤섞여 더 좋은 향이 되었다. 가끔씩 상념에 젖으며, 천천히 나누는 말.
분주하고 정신없는 아침이 아닌, 시간이 정지된 듯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갔다.

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

K: 증권사에 있는 친구로부터, 일명 증권사 지라시라고 부르는 정보로 알게 되었는데,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지점의 일인 줄 알았다. 그냥 그 불똥이 우리지점에 어떻게 미칠까만 걱정했었다.

앤: 액수가 사상 초유고, 그 일로 인해 그룹의 조직 개편까지 있지 않았나.

K: 처음 그 횡령액수를 들었을 때는 귀를 의심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 마비 걸리는 줄 알았다. 그때  웬만한 지점의 전체 자산보다 많은 액수였다.

앤: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 어떻게 한 사람, 그것도 직속상관이 그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모를 수가 있었나.

K: 그때 모든 사람이 그런 의구심으로 우리를 봤다. 공모 여부를 놓고, 회사 자체 감사실, 경찰에서까지 조사를 받으면서, 내가 힘들었던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를 횡령해서 주식에 투자한 일을 어떻게 바로 아래 직원인 내가 모를 수 있었느냐는. 회사를 그만두고 안 그만두고는 그 다음 일이었다.
내가 푯대로 살아 온, 가톨릭 신자의 윤리, 인생전체가 의심받고, 재단 받아야 할 입장에 처했다는 사실, 그것이 하루아침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현실이 너무나 두려웠다.


오랫동안 지인인 이 사람이 그런 일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그저 소문으로만 그 일을 짐작하다가 한 참후에 그를 다시 만나서 고작 내가 물었던 것은 괜찮아졌느냐는 질문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다소 격앙 되었다. 눌러 놓았던 화가 다시 치미는 모양이었다.

앤: 큰 아이는 군대 생활을 아주 잘하고 있는 듯.

K: 어린아이인 줄 알았더니, 군대도 선택하고, 어떤 곳에서 발령 받아야 할지도 신중하게 애써 노력해 갔더라. 생각하면 대견하다. 학교를 다시 선택한다고 해서 걱정을 시키더니. 다녀오면 또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앤: 부인도 그렇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아이들의 특징이 그 아이에게도 보인다. 사려 깊게 움직이고, 잘 키웠다.

K: 그 전에도 물론 신앙생활을 하긴 했지만 어려운 일을 겪으며, 신앙에 도움을 무척 많이 받았다. 연일 신문 지상에서 실명은 거론이 안 되어도, 그 사건이 오르내리며  나를 죄어 와도, 신앙안의 공동체는 나를 믿어 주고,  쉼의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다.

앤: 일단 공모죄의 혐의는 벗었지 않은가.

K: 나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까지 무혐의 처리되기까지 하루 두 시간 이상을 잠들지 못했다. 막상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법이라는 것이, 해석하기에 따라 한 사람을 피의자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더라.

앤: 회사를 그만둘 때 어떤 심정이었나?

K: 그 일이 터지기 전까지 돌아보면, 참 순조로웠다. 아니 사람들이 나더러 잘 나가는 인생이라고 했다. 또 그 당시 막 새로운 지점에 승진 발령 받아 의욕에 차 있을 때였다.

앤: 그 소식에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유능했던 사람인가.

K: 개인용으로 쓰던 자동차, 사무실, 책상 열쇠 내주고, 십 여 년 넘게 근무하던 회사에서 정말 쇼핑백 하나 들고 나올 때 심정은 말 그대로 허망했다.

앤: 그래도 면직 처리도 아니고, 자진 사표형식으로 처리되어, 퇴직금과 위로금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K: 그 일의 성격은 딱히 뭐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사실 나조차도 사건의 실상을 100% 정확히 파악했다고는 할 수 없다.
어쩌면, 또 그 때문에 그나마 그렇게라도 처리가 될 수 있었던 지도 모른다.
수 천 명이 평생을 몸 바쳐 일해도 위의 한 두 사람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조직이 우리나라 기업 조직의 특성이다. 그 억울함, 모순된 감정을 가까스로 재웠다. 나 같은 일개 조직원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그가 겪은 그 일은 빌게이츠나, 잭 웰치가 그토록 강조하는 기업의 투명성, 윤리성, 우리나라 기업풍토의 현실에서는 그저 요원한 선진기업 이상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앤: 그래도 공백기 없이 바로 일을 시작 했다.

K: 회사를 그만두고 딱 삼일, 무엇을 할까 고민 했다. 결론은 어디든 소속이 되어야 미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대인 기피증 같은 현상을 보이고, 밖에 나가는 것이 극도로 불안 했다. 
십 수년간 해왔던 아침 조깅을 못했던 것도 그때 였다.
거기서 내가 어디에도 출근을 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대로 영 못 일어 날 것 같았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릴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곧 대학에 진학할 큰 아이가 보였다. 그아이의 청청한 앞길을 나약한 아비가 되어 막을 수는 없었다. 어디든 소속되어야 했다.   때문에  내처지에서 가장 소속이 쉽고 비전을 볼 수 있는 일을 선택했다.

앤: 일은 어떤가?

K:  영업직이 쉽지는 않다. (웃음)  벌써 몇 년이 지났으니, 이제 슬슬 결과물을 봐야 할 때지만, 실물경기가 안 좋아 기대에는 못 미친다.

앤: 그 일이 있고 난 후, 가장 큰 변화라면?

K: 하루아침에 큰 조직의 간부에서, 말만 일인 기업인인 뚜벅이 신세로 바뀌었지만, 돌아보니 그 사건을 계기로 숨고를 틈도 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을 돌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내와 아이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집에서 살림하던 아내가 맞벌이를 시작했다.
 아직 제대로 된 월급봉투를 주지 못 하면서도, 이십 여 년 간 내가 월급봉투를 주었으니 이제 당신이 책임질 차례라고 낯 두껍게 말은 하고 있지만, 고생하는 아내가 안쓰럽다.

앤: 노후 계획도 세워야 할 듯.

K: 요즘 천주교안에서 총 단체장을 하고 있다. 아마도 나의 상처가 치유 되었다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활동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조금 더 있다가 공부 해 볼까 생각 중이다. 사람 사이에서 인기 좋은, 성격 좋은 든든한 아내와 내가, 교회안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앤: 주변에서 K는 믿어지는 몇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그 과정을 착실히 수행해 나가고, 결과물과 만나게 될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

K: 고맙다. 오늘 아침, 잘 먹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편하게 말할 수 있어 좋았다.

그는 씩씩하게 손을 흔들고 다시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은 자신이 가야할 목적지를 알고 걷는 확신에 찬 모습이다.
일단 정지 신호에 그는 잠깐 멈춰 섰다가 오던 길을 잠시 돌아 보고,  다시 직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가 만약에 아직도 잘 나가는 조직의 임원이었다면, 그의 아내와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자신을 도구로 쓰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가 안에 담고 있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덩이.

시련은 어떤 사람의 개인사든 등장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개인사에 시련에서 벗어나지 못한 또 하나의 아픔, 악순환을 기록하게 되고, 어떤 이는 시련에서 벗어난 다음 페이지를 기록하게 되는 ‘다름’이 있다.

인생이 산책처럼 여백이 있는 길이라면, 얼마나 살만할 것인가 가늠해보며, 점점 밝아지는 공원의 조붓하게 난 길을 따라 산책을 한다.

곧 신작로로 나서야만 할 시간이다.

IP *.38.10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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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4 12:28:12 *.71.235.8
은미와 창형의 피드백을 받아 들여 다시 이런 방식으로 써 봅니다. 동기들의 피드백이 얼마나 힘이 되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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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4 20:41:27 *.163.65.103
이상타. 그런 피드백 한적없는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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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4 23:14:19 *.71.235.8
요즘게 저번 것 보다 안좋다며, 음주후 피드백이었나요? ㅎㅎㅎ 어쨌거나 다시 바꿔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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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8.11.25 06:05:53 *.160.33.149

 전의 스타일이 좋다.  백배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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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5 13:33:23 *.71.235.8
몇 편을 쓰다 보니, 한계가 느껴졌었나 봅니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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