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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30일 14시 04분 등록


“아이고, 이제 어떻게 먹고살아” 울음 섞인 소리가 튀어나왔다. 쉰 중반이 넘은 어느 남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그 남자는 내가 대학시절 자취를 하던 집의 주인이었다. 배운 것 없고 반백에 체구가 작지만 가끔씩 웃을 땐 더할 수 없이 순박해 보이던 그런 사람이었다.

대학 때 자취를 하던 곳은 지금은 아파트와 건물들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에는 허름한 단층집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 집과 집 사이를 이어주고 집 주변에는 논과 밭이 되는대로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그 작은 집 중의 한 집에서 대학시절 자취생활을 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법 넓은 마당이 있고 안쪽에 허름한 안채가 있었다. 마당 한쪽에 대학생들에게 세를 놓으려고 뚝딱 지어올린 방 세 칸짜리 건물은 안채보다 신식으로 보였다.
집주인 아저씨는 지금 어림잡아 생각해보면 쉰 중반은 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십대 초반의 맏딸과 고등학교를 다니는 아들, 중학교 다니는 딸이 있었고 그 아래 초등학교를 다니는 딸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집에서 자취를 하던 때는 아이들이 넷 이라는 것에 대해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그 당시에도 넷이라는 숫자는 많은 축에 들기는 했지만 아주 드문 것도 아니었다. 요즘 생각해보니 아이가 많은 편이었다. 그것도 살림살이에 비하면 더욱 그랬다.
주인집 아저씨는 강냉이를 튀기는 게 업이었다. “뻥이요”하는 그것 말이다. 그때는 지역에 따라서 강냉이나 튀밥이라고 불렀다. 자그마한 체구의 아저씨는 아주머니와 함께 아침이면 리어카에 강냉이 기계를 싣고 시장으로 나갔다. 순박하고 착하기만 하던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열심히 일을 하셨고 항상 웃음으로 우리를 대했다. 그 웃음은 정말 편안한 표정이었고 부드러웠다.

수업이 일찍 끝나 마당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오후였다. 아저씨는 창고에서 강냉이 튀기는 기계를 손보고 있었다. 날씨 좋은 날의 평화롭고 한가로운 오후 풍경이었다. 마치 그림 속 모습 같던 풍경은 비명소리로 깨져버렸다. 창고 쪽에서 “으앗!”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돌아보니 아저씨가 한쪽 손을 다른 손으로 잡고 있었다. 손과 손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달려 온 아주머니가 수건으로 손을 감쌌다. 손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한 상황은 알 수가 없었다. “아이고, 이제 어떻게 먹고살아” “아이고, 이제 어떻게 먹고살아” 그 와중에 아저씨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였다. 그 말을 내뱉는 아저씨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저씨는 연신 외쳤다 “아이고, 이제 어떻게 먹고살아.”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은 말을 아저씨는 몇 번이고 토해냈다.
다행히 아저씨의 손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병원에 다녀온 아저씨는 일주일 뒤부터 다시 일을 할 수 있었다. 아저씨가 다친 손을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구를 때 옆에 서있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아주 난처하면서 묘한 기분이었다. 아저씨가 다쳤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이 다쳤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은 아저씨의 외침 때문이었다. “아이고, 이제 어떻게 먹고살아”라는 말이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들었다.

바로 며칠 전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졸업 이후 어디에 삶의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하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둘 중에 어느 쪽이 중요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푸르른 젊음의 시절에 나올만한 주제였고 관심도 많은 주제였다. 의견은 두 가지로 갈렸다. 한쪽에서는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하니 당연히 먹고사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쪽에서는 먹고사는 건 어찌되었건 해결이 될 것 같으니 살아가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했다.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하느냐, 삶의 방식이 더 중요하느냐의 격론은 당연히 결론 없이 끝이 났다. 그때 내가 어느 쪽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쪽이었던지 간에 그 이야기들은 치기어린 토론에 불과했을 것이다. 먹고산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겪어보지 못한 젊음의 어리숙한 철학일 뿐이었다.
단 하나의 체험도 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를 떠들던 대학생에게 “아이고, 이제 어떻게 먹고살아”라는 외침은 생생했다. 그것은 야생에서 먹을 것을 찾아 뛰어다니던 짐승이 쓰러지면서 남긴, 피비린내 나는 고기처럼 처절한 것이었다. 전혀 요리가 되지 않은 고기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삶이란 토론의 대상이라고 여겼던 학생에게, 눈앞에서 바로 드러난 삶은 외면하고 싶은 모습이었다.

대학생이던 그때에 비하면 너무나 많은 삶의 시간을 지나온 중년의 시간, 깊숙이 들어온 삶의 자리에서 먹고 산다는 것은 토론 대상이 아닌 생활이 되었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누구에게도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명제를 삶의 중심에서 치워버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누구도 피하기 어려운 그 명제는 이제 삶을 억누르는 주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라는 문제는 간단히 결론이 났다. 누가 감히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적 주제를 끌어안고 산다는 말인가. ‘먹고 살기’도 힘든 마당에 말이다.
살아보니 “아이고, 이제 어떻게 먹고살아”라는 말은 진리였고 철학이었고 삶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쟁이었다. 그것은 어떤 진리보다도 앞서 있었다. 그것은 그 어떤 철학의 명제보다도 윗자리에 있었다. 그것은 삶의 모든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몸을 바쳐야 하는 전쟁이었다.
젊은 그 시절, 아침에 부엌 쪽문을 열고나서면 주인집 아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보였다. 반백의 머리에 체구가 작고 아이 넷을 키워내야 하는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리어카에 강냉이 기계를 싣고 아저씨는 아침마다 먼 길을 걸어 시장으로 갔다. 그렇게 네 아이를 키우고 가끔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긴 시간이 지난 지금, 아침에 문을 열고나서면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보인다. 이제 머리가 조금씩 희어지려고 하는, 체구가 작고 아이들을 키워내야 하는 직장인의 모습이다. 아침마다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시장으로 간다. 그렇게 가정을 꾸려나가고 아이들을 키우고 가끔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신문에서는 쉴 새 없이 경제위기 소식을 전한다. 위기를 전하는 뉴스 뒤에는 당연하다는 듯 구조조정과 감원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이미 일부에서는 감원에 들어갔고 일부에서는 감원을 계획 중이라고 한다. 삶의 파도가 불특정 다수에게 몰려가듯이, 경제위기도 불특정 다수에게 몰려갈 것이다. 그 파도에 휩쓸려 가는 사람이 누구이던 그는 또 한사람의 아버지이고 남편이고 가장일 것이다. 그렇게 쓰러진 사람은 먹을 것을 구하려 뛰어다니던 들판에 피비린내 나는 자신의 고기를 내어 놓을지 모른다. 그 옆을 지나던 젊은이들은 무언지 모를 불편함에 눈살을 찌푸리고 흠칫 몸을 떨리라. 어찌되었거나 그는 이런 날카로운 소리를 한껏 질러댈지 모른다. “아이고, 이제 어떻게 먹고살아.” 그 소리는 언제 들어도 처절하고 불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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