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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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귀한가?”
“당신은 소금만큼 귀합니다.”
은유(隱喩)는 경험의 산물이다. 내가 아는 만큼, 느끼는 만큼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어서 상대방의 마음에 깊게 스며들지 않고 튕겨져 나올 때면 서로의 간극을 알게 된다. 내게는 ‘은유’의 방식이 상대방에게 가기 위한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는데, 생각해보면 늘 세상을 바라보는 차이를 깨닫게 해주는 방법이었다.
그것이 굳이 나쁠 이유는 없다. 내 생각을 좀 더 견고히 하게 되거나 새로운 경험의 필요성을 느끼는 일 정도로 마무리되면 좋을 일, ‘그냥 그렇구나’ 혹은 ‘아, 그렇구나’ 정도로 충분했고 그렇지 않다 해도 ‘뭐, 그 정도는’이란 말로 마침표 찍을 수 있었다!
…… 언제부터 그것이 비극이 되었나!
당신을 소금에 빗댄 저 말이 결국 파멸로 종결되는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인 『리어왕』을 모티브로 한다. 제 자식들에게 공식적으로 왕국을 물려주기 위한 늙은 왕의 테스트는 매우 단순하다. 자식이 여럿이 아니었다면 저런 테스트 따위가 필요 없었을 테지만, 권력이란 명목상으로는 늘 공정을 부르짖기에 답변에 대한 판별이 오로지 왕의 경험과 인식에 의해 이루어질 뿐이래도 질문이란 형식은 필요했을 테다. 그때든 지금이든 어떻게 소금과 황금이 같을 수 있느냐 한다면, 미다스 왕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가치’의 기준을 새롭게 정의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미다스 왕의 경험을 알지 못하는(안다고 해도 별다를 리 있었을까마는) 늙은 왕은 오로지 자신의 기호에 맞추어 모든 것을 정의하고 그에 맞춰 실행한다.
늙은 왕은 제 경험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기에 ‘은유의 방식’을 모른다. 아니다. 은유를 모른다는 것은 명백히 틀렸다. 늙은 왕은 제 경험 안에서 ‘은유’를 즐기고 그에 따라 사람들이 행동하기를 원한다. 그에게 언어는 제한적이다. 늙은 왕은 타인이 경험하는 세상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알려고 하지도 않지만 알 필요가 없다. 늙은 왕의 세상은 그가 경험한 세상의 언어로 이뤄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늙은 왕의 경험이 기준이 되고, 늙은 왕의 기호에 따라 옳음과 그름이 나눠지는 세계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세계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은유(隱喩)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소금과 막장 사이에 서 있는 순대의 세계다. 어릴 적 시장에 가면 곧잘 먹었던 순대는 돼지 창자 속에 쌀, 두부, 당면, 선지 등을 넣어 삶아낸 음식이다. 돼지피가 섞인 것을 알았다면 먹었을까 싶긴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먹었던 순대는 나이가 들어서도 즐겨 먹게 되는 음식이다. 순대를 먹는데 멈칫했던 순간은 순대에 돼지피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았던 때가 아니라 순대에 소금이 없던 순간이다. 소금을 받기 위해 되돌아가니 내게 쥐어진 건 막장이었다. 아주머니는 누가 순대를 소금에 먹냐며 막장을 가리켰지만 나는 소금에서 막장이라는 그 낯섦을 꽤 오래 간직했고 이 먼 곳으로 이사했음을 새삼 인식했다. 지금이야 막장에 순대와 양파를 찍어 먹으며 언제 소금을 먹었는지 기억이 까마득한데, 또한번 경계를 넘어 이사를 했더니 그때에는 순대에 초고추장이 나왔다. 그 또한 처음이야 낯설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이제는 어린 날의 기억으로 소금과 먹고플 때가 있고 양파와 함께 막장에 먹어질 때가 있고 꾸덕꾸덕한 초고추장이 생각날 때가 있다.
순대를 어디에 찍어 먹느냐는 그저 ‘기호’일 뿐이다. 내 입맛으로 우선순위를 정해 그때그때 나홀로 소스를 달리 먹을 수는 있지만 늙은 왕의 ‘기호’에 맞추어 순위가 매겨질 수는 없는 것이다. 늙은 왕의 기호에 맞추어 소금이 모두 사라지고 막장만이 순대 소스로 이뤄져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저 지역별 특성에 맞추어진 작은 차이일 뿐, 더구나 지금은 순대에 소금도 막장도 함께 나오기도 한다. 다양한 기호가 버무려지는 맛의 세계를 경험하지 않으면 그 낯섦을 배척하는 것을 당연시 한다. 우리 사회는 ‘지역’을 붙여 차이를 차별로 만들어 혐오하고 배척하는 일을 너무나 쉽게, 잘, 한다.
늙은 왕의 기호에 맞추어 움직이는 무수한 첫째와 둘째가 있는 세상이라서 그렇다. 늙은 왕의 비루한 인식이 첫째와 둘째에게 떠받들어 지면서 무수한 차별의 언어를 경험하게 된다. 순대에는 ‘떡볶이 소스’가 최고라고 누군가 외치면 세상 모두가 경직되어 버리는 늙은 왕의 세계. 소금과 막장사이에 선 순대는 어린 내게는 그저 ‘다르다’는 것을 일깨워준 말이었을 뿐인데 어른의 세계, 늙은 왕의 세계에 들어선 지금은 ‘틀렸다’는 말이 되었다. 다름이 틀림으로 이해되고 혐오와 배척을 당연시하는 폭력 속에 휘감겨진 그런 나라에서 온전히 내 기호를 찾아내고 나의 언어를 만들어 낼 수 있기를 소망하며 단어를 모은다. 늙은 왕의 세계에서 살며 그것이 경험이 되어가고 있지만 첫째와 둘째의 언어로 세상을 말하지 않으려는 나의, 서글픈 바람이자 조바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