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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퍼를 집어 든다. 두툼한 점퍼다. 밖은 바람이 불고 날이 차다. 겨울이 된 것이다. 점퍼 안에도 제법 두툼한 옷을 겹쳐 입었다. 등산화를 신는다. 등산화 끈을 조이고 발을 탁탁 굴러본다. 편안하다. 모자를 눌러쓰고 배낭을 둘러멘 다음 산으로 향한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낯간지럽지만 산은 산이다. 12월의 산은 썰렁하지만 그래도 산에 들어서면 좋다. 12월의 산. 그래 12월이다. 이제 며칠의 시간이 지나면 1년이라는 세월이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놈이다.
올해 초 4월의 어느 날인가도 점퍼를 집어 들었다. 지금보다는 얇은 점퍼였다. 안에 입은 옷도 얇은 티셔츠였다. 등산화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발을 탁탁 굴러봤다. 편안하다. 모자를 눌러쓰고 배낭을 둘러멘 다음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봄이었다. 4월의 산도 12월의 산처럼 푸르지 않았겠지만 그날은 산을 오르는 날은 아니었다.
12월과 4월 그날의 모습은 같은 듯 다르다. 복장은 같지만 점퍼와 티셔츠의 두께가 다르다. 배낭에는 12월에나 4월에나 물과 옷 한 벌이 들어있다. 모자는 같은 파란색이지만 모양은 다르다. 무엇보다 가장 다른 건 봄의 시작이라는 시점과 한 해의 끝이라는 시점일 것이다. 그 날은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한 사람들과 동해와 진전사를 가는 날이었다. 한 해의 시작은 1월이지만, 올해라는 한해는 사실상 4월의 그날에야 느지막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 12월. 느지막이 시작한 한 해는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봄에 나는 이런 말과 함께 4월의 그 버스에 올랐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것을 길어 올려 보고 싶다. 그 이후는 나의 몫일 것이다.’
한해의 끝에서 그 말을 다시 들여다보니 모든 것은 그냥 그대로 남아있었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것을 길어 올려 보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주변에서 떠돌고 있다. 그때도 알지 못했고 아직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 ‘그 이후 나의 몫’은 길어 올린 것이 없으니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결국 모든 것은 그대로 과제로 남아있다. 1년이라는 시간과 과정이 있었으니 분명 무슨 변화가 있긴 있으련만 눈앞에 드러나는 것은 없다. 눈으로 보지 못하니 변화를 이뤄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앞서고 마음으로 읽어내는 것은 서툴기만 하다. 시간은 지나가고 마음은 시간을 앞서 뛰어갈 만큼 조급하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더 동동거린다.
퇴근길에 들렀던 서점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서점을 가득 채운 사람들보다 몇 백배는 더 많아 보이는 책들이 어느 곳에서나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얼굴을 내밀고 있는 책들은 저마다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책들이 쏟아내는 말 때문에 서점은 정신이 없을 만큼 시끄러웠다. 귀를 잡아당기는 말도 있고, 마음을 잡아당기는 말도 있고, 너무 시끄러워 눈을 잡아당기는 말도 있었다. 어찌되었건 책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많은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은 듯 헤매며 시간을 보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싶어서 들렀던 서점에서 너무 많은 말을 들은 까닭일까. 그 목소리 속에 또 하나의 목소리를 더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방송을 처음 하는 사람들은 방송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들린다고 한다. 마치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몇 번의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지금 그런 과정을 거치고 있는 중일까. 내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도대체 알지를 못하겠다. 이리 뱉어보아도 저리 뱉어보아도 내 속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무엇인지 알기가 힘들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알아듣지 못한 목소리를 언제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소리든 일단 내어보면 그 속에서 진정한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글쎄, 그럴까? 모르겠다. 그만 쓸란다. 더 쓰기 싫다. 그렇게 한 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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