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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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2.
[내 삶의 단어장] 덕후의 나날
지난 삶을 돌아보건대 딱히 덕후 기질을 보인 기억이 없다. 연예인을 대표로 거론한다면 그와 관련된 영화와 드라마를 보거나 가수라면 음반을 사거나 공연을 보거나 등등의 활동을 한 기억이 없다. 좋아한 연예인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덕후에 대한 개념과 인식을 바꿔서 생각해봐도 마찬가지다. 다음 사전에 의하면 덕후란 일본어인 오타쿠(御宅)를 한국식 발음으로 바꿔 부르는 말인 ‘오덕후’의 줄임말로 결국 ‘오타쿠’와 같은 말이다. 내 비록 오타쿠란 단어에 비호감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언제부턴가 긍정적인 의미로 일컬어짐을 모르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사물이나 분야에 깊게, 열광적으로 심취해 있는 사람이란 때론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경이로울 수 있는 존재로 힘차게 달려가 볼 수는 없을까. 당연하다. 없다!
‘덕후’에는 자본주의적 소비행태가 포함된다. 그러니까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다면 나는 영원히 ‘덕질’이란 명칭을 부여받을 수 없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소비에 적극적이지 않고 상품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며 물건을 사는데 광고출연자에도 크게 영향받지 않는 걸 보면.
다음으로 시간이다. 그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챙겨 보려면, 노래를 들으려면, 공연을 가려면 어떡하든 시간을 내야 한다. 하지만 시간을 내는 일이란 몸으로 생각하기도 전에 누군가 내 바로 앞에서 열심히 떠들어주겠소 한다 해도 결국 귀찮음에 지고 마는 일이 허다한 까닭에 감히 누군가를, 무언가를 “좋아한다”라고 절절하게 말할 수 없다. 누군가를, 무엇을 좋아하는 일은 이렇듯 사랑과 관심과 애정을 시간과 돈이라는 형태로 듬뿍 담아다 주는 일이라는 것을 진즉 알았기에 떨떠름하게, 미지근하게 내 온도를 맞추어 놓은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어느덧 나이가 들고 제법 많은 삶을 겪고 보니 오래 써 고장이 날듯한 보일러가 아니라 잘 사용하지 않아 서투른 보일러가 된 나를 발견한다. 애초에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를, 무엇을 좋아한다는 폭발적인 에너지는 설정된 온도만큼 머물고 만다. 어떤 일련의 일들이 이 온도를 만들어 낸 것 같기도 하고 이 온도까지 밖에 올라가지 않았기에 “좋아한다”라는 말을 건넬 시간과 돈을 내지 않은 것도 같다.
누군가는 고독을 이야기하며 묻고 나는 고독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처럼 답을 한다. 사주까지 들먹이며 나는 고독에 최적화되어 있는 사람이라고까지 말한다. 태어날 때 기적처럼 우는 일이 주어진 이후로 난 몇 번이나 울었던가. 몇 번이나 웃었던가. 온도를 설정해 놓은 보일러처럼 감정을 컨트롤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최첨단 스마트기기가 아님에도 설정해 놓은 적정 온도까지만 올라가는 이 균형잡힌 감정의 온도. 감정이란 여러 말과 온도를 가지는데, 더 오르지 않는 이 감정의 온도 속에는 삶에 대한 욕망이, 애정이 있는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된다.
생각해보면, 열광적으로 누군가를 지지하는 일은 열광적으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이다. 전자에는 자본이 뒤따른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표현에서 시작하고 지속적인 표현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아닌 듯해도 그 표현에서 물질을 완전 배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일은 특별히 상품을 사줘야 하는 일도 아닌만큼 거리낌없다. 굳이 시간을 내 만날 필요도 없다. 어쩌면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엔 명확한 ‘이유’가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유있는 일에 매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일지 모른다. 애정은 주는 만큼의 애정을 되돌려 받고 싶은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그리하여 되받지 못하는 애정에 슬퍼하거나 아파하게 된다. 그러나 미움은, 그 미움의 대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그렇다. 내가 덕후가 될 수 있으려면 자본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보다 정의롭고 자유롭고 평화롭다는 느낌이 있을 때야 내 시간과 자본을 기꺼이 꺼내어 쓸 수 있다. 그 안정감 속에서 내 사고도 행동도 열릴 수 있는 것이다. 꽉 막힌 세상에 어떤 수로 무엇을 끄집어낼 수 있겠는가. 몰상식과 비상식 사회 속에선 내 시간과 자본을 기꺼이 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강탈당하는 것일 뿐이므로.
내가 덕후가 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덕후로 살아가기에는 매번 좌절되는 시간들이 생겨버렸다. 그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단절을, 폐쇄를 절감하는 나날들이 반복되고 길어져 나는 기꺼이 무력해진다. 나를 휘감던 그 미지근한 온도 속에서 나는 한껏 덕후가 되어 이유없는 수모를 이유있는 미움으로 바꾸려 애쓴다.
어떤 꽃은 음지에서 자라고 어떤 꽃은 양지에서 자란다. 어떤 이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고 어떤 이는 복수에 목숨을 걸고 삶의 목표로, 동력으로 삼는다. 나는 음지식물이라 밝은 햇살보다 습한 기운에 더 반응하는가. 이 찬란한 5월에, 내 오랜 무력(無力)을 탈하고 무력(懋力)하기 위해 나는 좀더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 힘을 쏟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