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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1일 23시 09분 등록


나는 늦된 놈이었다. 많은 것들을 늦게 깨치고 늦게 배웠다. 늦됨이 마치 개성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런 늦됨을 알아차린 것은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내고 난 다음이었다. 그것을 스스로 알게 된 시점은 딱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꼭 기억해야 할 이유도 없지만 아마 언젠가 가을빛이 좋은 오후였을 게다. 생각나는 것은 쏟아져 내리던 가을빛이다. 허공을 가득 채운 가을빛을 왜 그리고 어디서 그렇게 멍하니 받아내고 있었는지도 기억이 없다. 그 빛 속에서 떠올린 생각만 선연히 남아있다. 구도하는 선승처럼 그때 퍽하고 무언가 한 생각이 떠올랐다. 돈오돈수(頓悟頓修). 퍼뜩 떠오른 것은 그런 생각이었다. ‘아, 나는 많은 것들이 늦구나.’ 역시나 깨달음도 늦었다. 머리 안좋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늦됨은 태어날 때부터였다. 어머니는 마흔이 넘어선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졌다. 놀라서 아이를 떼어내려고 별의 별 수단을 다 써보았다. 당시에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됐다. 총동원령이다. 그럼에도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 질긴 놈인지 대단한 놈인지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박정희 대통령의 탄생일화와 거의 비슷하다. 그래서 한때는 대통령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을 깊이 하기도 했다. 물론 그게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것도 늦게야 알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취업도 그렇다. 남들은 빛나는 추천장 받아 들고 기업으로 은행으로 갈 때 다른 곳만 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기웃거리기만 했다. 뒤늦게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를 정하고 뛰어들었다. 늦은 만큼 남들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뭐 일찍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랐을 것 같지는 않다. 워낙 실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전체를 사정권에 놓고 시험을 보러 다녔다. 숱한 시험에서 탈락했다. 백수 3년차가 되니 심신이 한계점에 도달했다. 미치거나 쓰러지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뒤늦은 깨달음이 사람 잡을 뻔했다. 뒤늦는거 인생에 별로 도움 안 된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는데 역시 늦게 알았다. 한계점에서 간신히 취직했다.

결혼이라고 빨랐을 리 없다. 서른 중반을 넘겨서 간신히 결혼했다. 혼자놀기를 하며 버틸만큼 버텼지만 즐기지는 못했다. 남는 장사 아니었다.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억지로 버티다가 시간만 손해 봤다. 나중에 계산해보니 막대한 손실이다. 일없이 버티면서 살다가 여섯 달 동안 여자 쫓아다녔다. 간신히 결혼했다. 왜 일없이 버텼는지 아직도 모른다. 결혼을 하니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지나니 될대로 되어라 하는 심정이었다. 포기하듯 했는데 아이가 생겼다. 역시 늦었다.

그것들뿐이겠는가. 많다. 매끄러운 삶의 방법에 서툰 것도, 영악한 세상살이에 익숙지 않은 것도 그렇다. 늦되지만 늦된 대로 그렇게 살아간다. 이야기를 길게 늘려 썼지만 결국은 책 이야기다. 책도 지금까지의 다른 것들처럼 또 늦어질 모양이다. 미친 듯이 써보고 싶었는데 써보지는 못하고 미치기만 할 것 같은 안 좋은 예감까지 감돈다. 이번에는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한건지 모르겠다. 몇 번 넘어지기는 했지만 다시 일어나려 한다. 일어날 것이고 늦게라도 달릴 것이다. 늦되지만 늦된 대로 그렇게 써나갈 것이다. 망설이지 않고 나아갈 뿐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지 않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IP *.163.6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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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8.12.22 09:09:42 *.209.32.129
나역시 누구 못지 않게 늦되고 철이 들지 않은 사람이지만,
놀랍게도 그 '늦됨' 덕분에 배우는 것이 많아요.

책만 해도 그래요.
2년전 바로 이 즈음, 연구원 수료당시의 자신감이
얼마나 뭘 모르는 것이었는가를 깨닫는 것 하나 만으로도
늦게 오는 기회도 의미가 있습니다.

수명연장시대는
늦된 사람들의 것이라고 보입니다.

회한과 절실함을 가진 late bloomer가
대기만성의 기회를 갖게 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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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
2008.12.22 13:53:56 *.127.99.9
동병상련이요, 창.

망설이지 않고 나아가는 길 끝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지 않다는 건
자격지심에 두려움일 뿐, 
그래도 무엇이 있는지 우리 궁금해하기로 해요.

미친 듯이 써보고 싶었는데 써보지는 못하고 미치기만 할 것 같은 안 좋은 예감?
저도 그런 예감으로 잠잘 때 땀에 흠뻑 젖기도 한답니다. 

고민은 혼자 만의 것이 아니외다.

그러나 이렇게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그 것이 쓰는 자들의 미덕이거늘, 
당신은 잘 할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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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12.22 17:30:19 *.97.37.242
동감이라고 하면... 웃을라나?
장가 간거나, 애 낳은거나 나보다 훨 빠르면서...
나 같은 재주로도 써보겠다고 뎀비는 데... 엄살이 심한거 아니야? ㅎㅎ
창, 난 자네가 부럽네. 자네의 글재주, 감수성, 까칠함, 늦되도 끝장을 보고야 마는 집념...
뭐가 되도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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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칸양
2008.12.23 12:49:16 *.122.143.151

전체적인 내용을 2번 읽어보니,
내가 비록 지금은 너희들보다 늦게 가고 있지만,
찬찬히 가두 종국에는 너희를 다 따라잡을 수 있다~!! 뭐 이런 느낌이 드는디? 아닌감여? ㅎㅎ

어차피 창형은 한권쓰고 때려치울거 아니자너..
그리구 책으로 밥벌어 먹을거자너..
내가 볼 때 창형은 첫권에 대한 산고만 무사히 넘긴다면,
탄탄대로 같은데.. 형의 자기다움만 제대로 발산할 수만 있다면 말야..
자신을 속이는 자신을 불신하지말고, 자신을 믿는 자신만 추종해.
형은 우리들에게 큰 기쁨, 자랑거리(안주거리? ㅋ)가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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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2008.12.23 17:12:07 *.161.251.173
뭐 그냥 쭉 이어서 쓰면 되겠구먼...
중년 남자의 늦된 스토리인줄 알았네.
아무튼 이런것도 잘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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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8.12.23 23:56:19 *.37.24.65
형..... 늦은걸로 치면 나도 꽤 그래..ㅎㅎ
앞으로 난 형을 보고 갈꺼야. 알아서해..
글구.  형이 알려준 책 내일 도착해. 인터넷에서 서평을 봤는데 그 작가분도 늦깍이더라.
형하고 비슷한거 같어. 물론 실업계출신은 아니었어. 행정학과를 나왔더만.
아마도 아들이 공고생인가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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