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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늦된 놈이었다. 많은 것들을 늦게 깨치고 늦게 배웠다. 늦됨이 마치 개성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런 늦됨을 알아차린 것은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내고 난 다음이었다. 그것을 스스로 알게 된 시점은 딱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꼭 기억해야 할 이유도 없지만 아마 언젠가 가을빛이 좋은 오후였을 게다. 생각나는 것은 쏟아져 내리던 가을빛이다. 허공을 가득 채운 가을빛을 왜 그리고 어디서 그렇게 멍하니 받아내고 있었는지도 기억이 없다. 그 빛 속에서 떠올린 생각만 선연히 남아있다. 구도하는 선승처럼 그때 퍽하고 무언가 한 생각이 떠올랐다. 돈오돈수(頓悟頓修). 퍼뜩 떠오른 것은 그런 생각이었다. ‘아, 나는 많은 것들이 늦구나.’ 역시나 깨달음도 늦었다. 머리 안좋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늦됨은 태어날 때부터였다. 어머니는 마흔이 넘어선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졌다. 놀라서 아이를 떼어내려고 별의 별 수단을 다 써보았다. 당시에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됐다. 총동원령이다. 그럼에도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 질긴 놈인지 대단한 놈인지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박정희 대통령의 탄생일화와 거의 비슷하다. 그래서 한때는 대통령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을 깊이 하기도 했다. 물론 그게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것도 늦게야 알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취업도 그렇다. 남들은 빛나는 추천장 받아 들고 기업으로 은행으로 갈 때 다른 곳만 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기웃거리기만 했다. 뒤늦게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를 정하고 뛰어들었다. 늦은 만큼 남들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뭐 일찍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랐을 것 같지는 않다. 워낙 실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전체를 사정권에 놓고 시험을 보러 다녔다. 숱한 시험에서 탈락했다. 백수 3년차가 되니 심신이 한계점에 도달했다. 미치거나 쓰러지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뒤늦은 깨달음이 사람 잡을 뻔했다. 뒤늦는거 인생에 별로 도움 안 된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는데 역시 늦게 알았다. 한계점에서 간신히 취직했다.
결혼이라고 빨랐을 리 없다. 서른 중반을 넘겨서 간신히 결혼했다. 혼자놀기를 하며 버틸만큼 버텼지만 즐기지는 못했다. 남는 장사 아니었다.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억지로 버티다가 시간만 손해 봤다. 나중에 계산해보니 막대한 손실이다. 일없이 버티면서 살다가 여섯 달 동안 여자 쫓아다녔다. 간신히 결혼했다. 왜 일없이 버텼는지 아직도 모른다. 결혼을 하니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지나니 될대로 되어라 하는 심정이었다. 포기하듯 했는데 아이가 생겼다. 역시 늦었다.
그것들뿐이겠는가. 많다. 매끄러운 삶의 방법에 서툰 것도, 영악한 세상살이에 익숙지 않은 것도 그렇다. 늦되지만 늦된 대로 그렇게 살아간다. 이야기를 길게 늘려 썼지만 결국은 책 이야기다. 책도 지금까지의 다른 것들처럼 또 늦어질 모양이다. 미친 듯이 써보고 싶었는데 써보지는 못하고 미치기만 할 것 같은 안 좋은 예감까지 감돈다. 이번에는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한건지 모르겠다. 몇 번 넘어지기는 했지만 다시 일어나려 한다. 일어날 것이고 늦게라도 달릴 것이다. 늦되지만 늦된 대로 그렇게 써나갈 것이다. 망설이지 않고 나아갈 뿐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지 않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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