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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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월달부터 쓴 마음편지가 이제 일흔다섯번째까지 왔네요.
제가 잘못 기억하는게 아니라면 한 주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낸 것 같습니다.
지난 1년반정도의 시간, 차곡차곡 쌓인 보낸 편지함에 쌓인 글들이 지금의 저에게 어떤 의미인지 돌아봅니다.
1년정도 지나고 나서 부족한 글을 억지로 뽑아내다보니 편지를 계속 보내는 것이 맞는지 하는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일상의 치열함이라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기에, 채우지 않고 사색하지 않다보니 이제는 글을 쓴다는 것이 스스로 창피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결국 모두에게 미안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제 스스로에게 미안합니다.
장 그르니에의 책 <섬>에서 옮긴이 김화영 선생이 서문에 쓴 문장들이 제 폐부에 깊숙히 박히는 것 같습니다.
<글의 침묵>
아무나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주워온 지식들로 길고 긴 논리를 편다. 천직의 고행을 거치지 않고도 많은 목소리들이, 무거운 말들이 도처에 가득하고, 숱하고 낯선 이름들이 글과 사색의 평등을 외치면 진열된다. 정성스럽게 종이 위에 말 없는 장인이 깎은 고결한 활자들이 조심스럽게 찍히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 (이하 생략)
지지난 편지에서 좋은 술, 나쁜 술, 좋은 위로와 질 낮은 위로 같은 것은 없다는 말씀을 감히 드렸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일 뿐 위로하는 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은 스스로에게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위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의 피로 쓰여지지 않은 어줍잖은 생각들을 자신의 생각인건마냥 그대로 활자로 옮기는 것은 작가를 지향하는 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령 선생이 생전에 그랬죠. 사람들은 글씨 쓰는 사람과 글 쓰는 사람을 혼동하는데, 글씨 쓰는 사람은 서경. 즉 베끼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베끼는 것에서부터 창조가 시작됩니다. 무수한 베낌이 안에서 숙성이 되면 그건 남의 생각이 아닌 자신의 생각이 됩니다. 허나 숙성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채우지 않고 비우기만 하다보니, 설익은 생각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듯 합니다. 채움과 숙성의 시간이 제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채움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도 길지 않겠지만, 조금 채움의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이제껏 그냥 외면해왔지만 조금씩 깊어지던 제 안의 텅 빈 웅덩이가 이제 제법 커져있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이라고 하죠. 채우지 않고는 전진할 수 없습니다.
한 달 정도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읽고 보고 경험하고 배우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후 영글지 않은 제 생각 대신에 그동안 읽었던 책들의 좋은 글귀들을 모아서 마음편지를 대신해볼까 합니다.
한 달 휴가 다녀오겠다는 말씀을 너무 구구절절히 드렸네요.
다시 뵐 그날까지 올 여름 무탈하게 잘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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