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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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수정(1)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려보았다. 햇빛 한 자락이 손가락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오늘은 한줄기 빛만으로도 눈부신 하루다. 을지로 지하도를 나와 계단 끝에 선 나는 오른 손으로 가방끈을 잡고 왼손을 들어 하늘을 가렸다. 요 며칠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지독히도 쏟아내던 가을장마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강렬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올 여름 유난히도 비가 잦아 가을엔 맑은 하늘을 많이 볼 수 있겠다고 기대했는데 역시나 내 기대는 보기 좋게 빚나갔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이곳을 찾는 횟수가 점점 더 잦아졌다. 학교수업은 하는 둥 마는 둥이고 하루가 다르게 교실에 빈 의자만 점점 늘어갔다. 취업을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아이들은 학기가 시작되고도 보이지 않았다. 여름방학부터 실습생으로 취업을 나가 그곳에서 둥지를 틀었는지 몇몇 아이들의 의자엔 먼지가 쌓이고 있었다. 누군가 잠시 걸터앉았던 궁둥이 자국이 선명하다. 쌍 바위 모양의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그었는지 반으로 갈라지다 만 것이 똥침을 맞아 비명을 지르는 입 모양이다.
친구들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지만 난 묻지 않았다. 별로 친하지 않아서 이기고 했지만 그러면 내 모습이 더 초라해 보일까봐서 그랬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아직도 많은 아이들이 교실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따라 교실 앞 벽에 걸려있는 태극기와 교단만큼 떨어져 매달린 급훈이 실감나가 다가왔다. 소심한 나는 대범해지고 싶다.
‘대범’은 우리 반 급훈이다. 담임선생님 작품인데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지나 고등학교 2년까지의 모든 급훈을 다 합쳐도 ‘대범’을 따라올 만큼 맘에 드는 것이 없다. 성실, 근면, 협동, 바르게 살자, 최선을 다하자 등등 한귀로 들어오면 곧바로 반대편 귀로 통과되는 급훈은 왜 그런 것을 걸어놔야 하는지 내 우둔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대범’은 파격적이고 신선하다. 짧아서 좋고 잔소리가 아니어서 맘에 든다. 급훈이 존재하는 마지막 학년에 ‘대범’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담임선생님은 요즘 남아있는 아이들과 한참 개인면담 중이다. 공고를 들어왔으면 취업을 먼저 생각해야하지만 대학을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꽤 있다. 그러나 나는 취업을 할지 대학을 갈지 아직 결정을 하지 않은 상태다. 아니 결정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편이 더 맞는 것 같다. 난 아직 담임선생님과 면담도 하지 못했다. 아직 내 차례가 아닌가보다.
우리학교의 3학년 2학기 풍경은 썰렁하다 못해 시원하다. 듬성듬성 주인을 잃은 빈자리는 바람을 막아주지 못한다. 오늘도 점심시간이 끝나고 담임선생님이 종례를 하러 들어왔다.
“취업 나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
난데없는 담임선생님의 질문에 아이들은 떠들던 입을 닥쳤다. 평소 조용조용 이야기 하는 선생님이 큰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아이들 틈에서 경관이가 입을 열었다.
“뭐하는 덴데요.”
“그건 나도 잘 모른다. ‘화도전산’이라는 회사라는데 캐드(CAD)를 한다고 그러더라.”
또 한 번의 정적이 흘렀다. 아이들은 담임이면 그 정도는 확인하고 취업 이야기를 꺼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회사 이름으로 뭐하는 회사인지도 모른다면 큰 회사는 아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종례 끝나고 교무실로 와라.”
그 말을 끝으로 담임선생님은 종례를 마쳤다.
“야! 빽. 함 가볼까?”
나는 별로 관심도 없어하는 백승진을 꼬셨다.
“히히. 너나 가라. 난 갈 때가 있다.”
난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년을 동거 동락한 빽이 나도 모르는 어떤 곳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리고 빽은 그 잘난 자격증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1학기 때 본 의무검정에서도 떨어져 쪽팔려 죽겠다는 넘의 입에서 갈 때가 생겼다는 말이 나오다니. 이 넘과 나는 정말 동병상련이다.
“뭐....... 어딘데 거기가?”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예의상 물어봤다.
“광주로 내려간단다. 큰아버지 밑에서 집짓는 거 배운 덴다.”
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옆에 있던 인열이가 코를 벌렁거리며 말을 튕겼다.
“얌마! 그거 말이 좋아 집짓는거지 노가다 아냐!”
쪽팔려서 잡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빽하고 떨어지는 것도 싫었다. 염장이나 지를 심산으로 약을 올렸다. 그렇지만 이런 면에서 빽은 확실히 나보다 한 수 위다. 넌 떠들어라 난 잠이나 잘난다는 마음가짐으로 딱 한마디만 던졌다.
“노가다 맞어. 난. 노가다가 좋아.”
노가다가 좋다는 넘 한 테는 뭘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기계쟁이가 기계밥을 먹어야지 왠 노가다 밥을 먹으러 간다고 지랄여 지랄이.......’
입 밖으로 나오려던 염장지름이 이러다 한데 맞을 것 같아 거기서 멈췄다. 그래 넌 싸움도 좀 하니까 거기서 몇 년 굴러먹고 십장질이라도 하면 그게 출세지 뭐 별거 있겠냐 싶었다.
“최! 같이 가자.”
이 말을 하고 내가 후회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최인열 이 녀석은 2학년 때부터 그래픽 디자인인가 뭔가를 한다고 종로의 학원가를 들락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넘은 분명 나한테 또 잔소리를 들어부을 것이다. 나에 이런 예감은 열 번 중 아홉 번은 적중했다.
“야! 홍....... 내가 뭐라고 그랬어. 똑바로 하라고 그랬지.”
“공부를 잘하던지. 아니면 서경수 마냥 제도를 확실하게 하던지. 그것도 아니면 뭐 하고 싶은 거 하나 잡아서 그걸 족치던지........”
점쟁이 빤스를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내 예감은 언제나 적중했다. 웃으면서 말하는 놈이 더 얄밉다. 이놈에 잔소리. 황소 눈알보다 정말 조금 더 작은 눈을 깜빡이며 떠드는 모습은 정말 연극을 해도 출세할 넘 이다. 아마 이 넘은 돼지띠가 아니고 분명 소띠일 것이다. 호적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고서는 남자 놈 눈이 저렇게 클 수는 없다. 어쨌든 나는 2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이 두 넘 한 테 제대로 쪽팔림을 당했다. 그렇다고 지들도 뭐 그리 잘날 것도 없는 넘들이. 아. 진짜 인생 드럽다. 내가 담임한테도 이런 소릴 안 듣는데 친구라는 넘들 한 테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하다니.
어쨌거나 나름대로 우수한 성적으로 공고에 입학해서 지금은 우수운 성적이 되었으니 공부로 대학가기는 이미 글러먹었다. 그렇다고 남들 다 따는 자격증 하나 없으니 돈 많이 벌수 있는 대기업 가긴 대학보다 더 힘든 현실이 되었다. 그 다음은 중소기업인데. 여기도 만만히 볼 때는 없다. 이미 난 전공을 살려 뭘 해보겠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멀리 와버렸다. 설상가상이다. 그러면 난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냔 말이다.
“야! 빽, 최. 이제부터 아는 체하지 마라. 아주 그냥 죽는다.”
“니들이 친구냐! 친구야!”
“애이~~ 씨불놈들아.”
차라리 왜마디 비명을 지를 걸. 뭔 일이 있을 때마다 써먹은 이 식어버린 레파토리를 또 써먹을 줄이야. 이 두 넘은 이제 이골이 난 듯. 마지막 카운터 펀치를 나에게 날렸다.
“아주. 지랄을 해라. 지랄을 해.”
빽은 바리톤으로, 최는 소프라노다. 이 넘들 화음 작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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