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 조회 수 1063
- 댓글 수 1
- 추천 수 0
태명은 짧은 기간 동안 불리는 이름입니다. 태어나기 전까지, 혹은 본명이 정해지기 전까지 다른 아기와 구분되어야 하는 존재로서 필요한 경유지 같은 이름이지요. 또한 새로운 생명에게 주어지는 최초의 이름으로써, 마음 깊은 곳 아주 따뜻한 곳을 건드리는 설렘과 건강하게 만나고 싶다는 기원이 담긴 이름이기도 합니다.
태명을 고민하면서 남편은 ‘본명으로도 쓸 수 있는 태명을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연초에 있었던 유산을 신경 쓰고 있던 터라 ‘찰떡’이나 ‘홍삼’처럼, 제법 유행하면서도 건강에 관련된 이름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제안한 ‘겨울’도 꽤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해서, 새로 잉태한 아가에게 겨울이라는 태명을 정해주었습니다.
저는 손발이 금방 차가워지고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태어날 아기를 ‘겨울’이라고 부르면서 세상에 좋아하는 것이 하나 늘었습니다. 겨울이의 생일이 올 때마다 앞으로 평생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기다릴 것이고, 다음 겨울을 상상해 보며 즐거워하겠죠. 내년에는 겨울이가 첫 번째 생일을 맞겠구나, 어린이집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겠구나, 혹은 학교에 가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맞이할 앞으로의 겨울은 예전만큼 춥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겨울이를 만나기까지 아무 일 없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말부부로 시작했던 우리 부부 두 사람의 생활이 안정되기를 기다려야 했고, 막 생겨나기 시작했던 한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때 섣불리 많은 사람들에게 임신 사실을 전했던 자신이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대를 버리는 태도를 배워야 했고, 막상 겨울이를 다시 임신했을 때는 더 객관적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아이의 운명은 내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기의 심장이 뛰고, 새로운 장기가 생기고, 팔다리가 점점 길어지면서 저는 완전히 이 조그만 생명체에게 빠져들었습니다. 밤에 침대에 누우면 아이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게 느껴졌습니다. 들리진 않지만, 아이의 심장이 저와 같이 뛰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아이는 6개월 정도 자랐습니다. 임신에는 힘든 점도 있지만, 다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행복감도 함께 줍니다. 임신이 두려워만 할 일은 아닌 것인 모양이지요.
임신 기간 동안 얻은 것은 행복감 외에도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우선, 임신의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의 존재가 나의 기원에 관해서도 어떤 힌트를 주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떤 인생이든 어머니의 조그만 아기집에서 시작됩니다. 이 아이를 통해 한 인생의 몇 십 년 뒤까지를 상상해 보곤 하는데, 아이의 영혼 속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찾아내게 될 순간을 조우할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탐색의 과정은 제 안으로 돌아와 저에게도 잊힌 기원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깨닫게 만듭니다.
또 다른 것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의 강렬한 기억입니다. 첫 책을 쓰면서, 아버지와 함께 했던 좋은 기억들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아이의 존재는 앞으로의 제 인생에 있어 커다란 변화의 시작이자 새로운 페이지들을 채워나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저자는 글쓰기를 통해 문자 안에 자신의 내면을 관통했던 시공간을 정박시키고, 저자 자신은 그 시공간으로부터 떠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기억을 기록하는 것은 어찌 보면 글을 가까이하는 사람으로서의 필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인생의 잊지 못할 순간은 가슴속에 남고, 저는 계속해서 나이를 먹어가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부모만큼 강렬한 계기란 바로 저의 새로운 가족이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무더위가 지나가고, 매미 울음소리가 사라진 요즘, 바람이 불면 겨울의 예감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지나면 겨울이 옵니다. 겨울이가 옵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4270 | 목요편지 - 한 해를 보내며 [1] | 운제 | 2018.12.27 | 879 |
4269 | [수요편지] 월급쟁이, 구멍난 양말 같은 | 장재용 | 2019.07.03 | 880 |
4268 | [금욜편지 40- 신화속 휴먼유형- 헤라클레스형 2-열정과 분노사이] | 수희향 | 2018.06.08 | 881 |
4267 | 아침에 새소리를 듣고 [1] | 운제 | 2018.11.22 | 881 |
4266 | [일상에 스민 문학] 2019년의 다짐 | 정재엽 | 2018.12.19 | 881 |
4265 | [수요편지] 나와 별과 산 [1] | 장재용 | 2019.04.24 | 881 |
4264 | [자유학년제 인문독서 #06] 삼국유사 (1부) | 제산 | 2018.07.23 | 882 |
4263 | [자유학년제 인문독서] 10. 파업이 끝나자 마자 사준 책 | 제산 | 2018.12.17 | 882 |
4262 | 어린이날 어떻게 보내셨나요? | 제산 | 2019.05.06 | 882 |
4261 | [일상에 스민 문학] 휴가 책 리스트 | 정재엽 | 2018.07.24 | 884 |
4260 | [알로하의 맛있는 편지] 암흑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꿈 2 [2] | 알로하 | 2019.03.23 | 884 |
4259 | [수요편지] 라오스의 월급쟁이들 [3] | 장재용 | 2019.03.27 | 884 |
4258 | 목요편지 - 빼지마라 | 운제 | 2019.07.19 | 884 |
4257 | [수요편지] 니체가 월급쟁이에게 | 장재용 | 2020.03.04 | 884 |
4256 | Business Tip - 삶의 겨울나기 | 書元 | 2017.11.18 | 885 |
4255 | 사유의 확장을 위한 <열한 계단> (마지막 편) [2] | 차칸양 | 2018.04.10 | 885 |
4254 | 목요편지 - 나의 취미 빙상 [2] | 운제 | 2018.05.10 | 885 |
4253 | [일상에 스민 문학] 휴가 책 이야기 2. | 정재엽 | 2018.08.22 | 885 |
4252 | 목요편지 - 2019년 후반전을 위하여 | 운제 | 2019.07.04 | 885 |
4251 | 기억의 회향(回向) | 書元 | 2017.10.06 | 8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