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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9일 19시 12분 등록

한국 나이로 서른여섯이었던 작년에, 일단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난임 병원을 가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임신이 잘 안되는 경우도 주변에 꽤 많이 있어서, 산전 검사를 하고 여차했을 때 인공적인 방법을 고민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대응 가능 범위를 확장해서 계획을 세웠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이미 임신이 된 지금에서야 별일 아닌 것 같지만, 초반에는 삼십 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좀 신경 쓰여서, 일단 난자를 채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었습니다.


시험관이라는 대안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회사의 난임 휴직 제도를 3개월간 사용해 보기로 했습니다. CEO 신문고를 통해 올해 신설된 제도이기도 하고, 조직 분위기도 난임 휴직을 사용을 용인해 주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3개월간 한 달에 하나씩 시험관을 위한 과정이 진행되었습니다. 11월에 했던 인공 수정 시도가, 시도에 그치면서 12월에는 난자를 채취했습니다. 본격적으로 과배란을 유도하기 위한 주사를 놓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하루에 하나씩 놓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뱃살을 잡아서 주사기를 꽂는 것도 며칠 만에 제법 익숙해졌고, 질정을 넣거나 다른 약재를 투여하는 것도 어찌어찌 혼자 해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회사를 휴직하면서 하루를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 크나큰 즐거움을 가져다줘서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매달 말일이 가까워지면 들어오던 월급이 없는 것은 상당히 큰 변화였습니다. 언젠가 회사를 더 이상 다니지 않게 된다면 이런 페이스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휴직이 어찌 보면 퇴사를 체험해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12월 채취를 하고 나서 1월 말에 시험관 1차 시도를 했습니다. 제 담당 주치의 선생님은 침착한 편이어서 제가 불안을 느낄 때마다 금세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낭성 난포 증후군이 발견됐던 저는 난자 채취를 했을 때 충분한 양의 난자를 얻을 수 있었고, 거기서 다시 수정란을 여섯 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채취를 다시 하기 전까지 상당한 시도를 할 수 있게 충분한 양을 얻은 셈입니다.


그리고 1월 말 시험관 1차 시도를 했다. 마취 없이 침대에 실려 수술실에 들어가서, 환자용 침대에서 수술대로 이동하고, 자리를 잡고 누워있으니 주치의 선생님이 들어오셨습니다. 멀리서 아득한 노랫소리가 들리고 해동시킨 상태 등급이 가장 좋았던 수정란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자궁 어딘가에 자리를 잡는 것이 화면으로 보였습니다. 산부인과 수술대는 끔찍하게 생겼고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웠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두근거림이 느껴졌습니다.


의학의 힘으로 착상까지의 과정을 대체하게 된 장점 중 가장 큰 것은 그 과정 하나하나를 산모가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지식에 의해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밖에 없는 과정을 모두 볼 수 있는 것은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시술이 끝나고 회복실에 잠시 누워있다가 귀가했습니다.


며칠 뒤 임신 확인을 위한 피검사를 받으러 병원을 다시 찾았습니다. 몇 시간 뒤에 검사 결과가 나올 텐데 임신으로 판명되면 다시 병원에 와서 다음 단계를 위한 처방을 받아야 한다고 하여 명동으로 가서 칼국수를 먹고 성당에 갔습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운 와중에 임신되었다는 확인 전화를 받았습니다.


6주, 아기집을 확인하고 심장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게 생명의 소리구나. 인간이 만들어지면 심장부터 만들어지는구나. 이것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소리구나. 그리고 내 안에 있구나.’ 영원히 듣고 싶을 만큼 진료실을 가득 채운 심장소리였습니다. 아마 이때쯤 제가 마음 편지를 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 7주 차에 병원을 갔는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더 이상 태아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성된 아기집을 어떤 방식으로 제거할 것인가에 대해 안내를 들었습니다. 저는 조금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다시 병원을 나왔습니다. 남편과 둘 다 주차장까지 가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차에 타서 문을 닫자마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점심 약속이 있어서 약속 장소로 이동하는데 계속 눈물이 나는 것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차에 있던 휴지를 모두 쓴 다음에야 약간 슬픔이 가라앉았고,제 머릿속에는 한 가지 질문만이 남았습니다. ‘뭐가 잘못된 걸까?’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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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0 09:07:10 *.97.54.111

저도, 눈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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