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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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주 내외 임신 초기 내의 유산은 산모의 잘못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수정란에 이상이 있어서 자연 유산되는데 저도 그런 사례 중 하나였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육체는 어느 정도는 자연적으로 소멸되는 것이지요. 다만 유산 진단을 듣고 제가 며칠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속이 안 좋아지고 있어서 (일단 아기집이 있다면 입덧 증상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중절 수술을 최대한 빨리 잡았습니다.
자궁 속을 비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중절 수술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방법에 비해 빠르게 몸을 임신 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유산을 하면 바로 다음 임신을 시도하는 것보다 적어도 한 두 번 정도는 제대로 배란이 되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받았습니다. 몇 달에 걸친 계획을 세우고 수술 일자를 확정했습니다.
중절 수술은 배아를 이식받았던 곳 바로 옆의 수술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전에는 아이를 얻는 과정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이를 없애기 위한 장소가 된 셈입니다. 수술대에 눕고 곧 마취약이 주사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마취에서 깨고 보니 뱃속에 태아가 있던 상태에서 태아가 없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어 버린 것 같아 허전한 마음이 컸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듯한 기분에 저는 완전히 잠겨버렸습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동안 남편도 저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사납게 날뛰어 밤에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수술 후 배아의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는데, 이 배아는 15번 염색체가 세 개 있었습니다. 즉, 성염색체를 포함해서 스물세 쌍, 총 마흔여섯 개의 염색체가 있어야 하는데, 이 배아는 마흔일곱 개였던 것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육체의 자연적 소멸’에 해당하는 경우였습니다. 저는 이때에서야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진정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에서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아이를 갖겠다’는 마음 정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임신을 하고 있는 당사자조차도.
난임 휴직 마지막 달인 2월에 일어났던 일이라 저에게는 슬퍼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복직이 걸려 있으니 상황을 이야기해야만 했고, 이제 막 임신이 됐다고 말한 상황에서 한 주 만에 유산이 됐고, 다다음 주에는 복직을 해야 한다는 일정이 편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상태가 일상으로 바로 돌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동안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OTT 콘텐츠를 엄청나게 봤습니다. 그중에 ‘수리남’이라는 드라마를 봤는데 거기서 협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사가 나왔습니다. “네가 협상의 법칙을 모르는구나. 될 때까지 하는 게 협상이야.”라는, 약간 허세가 들어간 평범한 대사였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협상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임신과 출산까지도, 될 때까지 하면 되는 거구나. 과정이 어떻든 내가 가져야 하는 것은 과정을 관철시키는 의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아이를 낳는 것은 제가 하는 일이죠. 나 이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해내면 하는 거고 못하면 못하는 일입니다. 그날 밤 저는 묘한 다짐을 갖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의지로 마음속을 다시 채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유산된 배아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아직 인간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 작은 존재였지만 ‘처음’이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큰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던 짧은 만남에 대해서, 고맙고 사랑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반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이 과정이 있었던 덕분에 임신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징조나 고민거리도 담담하게, 어느 정도는 즐겁게 지나온 것 같습니다. 살면서 아무 어려움 없기를 바라지만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만은 흘러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괴로워할 시간을 갖고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