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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4일 13시 59분 등록

<모정>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를 본 계기가 있습니다.

 

10년 만에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의 내면에 펌프질을 하는 아파쇼나타의 열정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대면해서 만나면 그 사람은 내가 편지로 만나는 그 사람이 아닐 거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글 만으로 나는 그 때 그 사람을 만났고 사랑했습니다.

 

어느날, 그것 마저 부질없단 생각이 들던 어느날,

무작정 연락을 끊었고 그렇게 10년이 흘렀습니다.

 

그런 그를 10년 만에 만났습니다.

그는 아직도 뜨겁고 자신이 소망하던대로 미술과 철학과 문학을 거쳐

그것들을 다 수용하는 가장 큰 바다라고 생각하는 음악에 이제는 자신의 짐을 다 풀고

남은 인생을 음악과 살다 가겠다고 합니다.  

 

단 하루, 저는 시간을 내서 그가 음악을 강의하는 공간에 청강생으로 앉아 보았습니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공간에 내가 있어주기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이루어지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과,

스치는 바람에도 두근거리는 심장에 대해,

그리고 인생의 외로움에 대해 말했습니다.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평생 연모만 했던 함부르크 사나이 브람스와,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독일의 낭만파 시인 빌헬름 뮐러가 사무쳐하던 보리수 나무를 찾아가
그 아래서 작은 영혼을 팔딱여야 했던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강의를 듣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를 통해 '다만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라고 노래한 거 아시죠

여러분도 언제나 그리움 가득 찬 삶을 살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랑하는 이의 창에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제6곡과 같은 노래 하나쯤 보내도 좋은 계절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공간에 있는 나에게 침묵의 텔레파시로 전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홍콩 리펄스 베이가 내려다 보이는 그 언덕의 나무,

윌리엄 홀든과 제니퍼 존스가 주연한 영화 <모정>의 그 나무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앤디 윌리엄스의 소프트한 보이스로 여울지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안타까움으로 막이 내리던 그 영화 모정,

그 마지막에 울려퍼지던 노래가 바로 영화의 영어 제목이 된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입니다.

 

이제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 홍콩의 추억을 찾아

그날 밤 저는 <모정>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홍콩 빅토리아 파크 언덕의 그 나무,

마크와 스윈이 함께 수영해서 건넜던 물빛 투명한 바닷가,

함께 탄 벙크선, 마카오에서의 뜨겁던 날들,

중국에서의 혁명 후유증으로 가난한 난민들이 홍콩으로 밀려들고

한국은 한국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던 1949년과 50,

그런 외압에도 두 사람에게 사랑은 숨을 멎게 하는 마술이면서

살아있음을 찬미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영화 한 편으로 가슴이 벅찬 하루 저녁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자신 안에 일어난 범상치 않은 변화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하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흘러가는대로 시간에 감정을 맡겨선 안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붙잡을 수 없는 그리움과 외침이 풍랑처럼 마음 속에 일었습니다.

누구의 관심을 새로 받아들이는 것이 한없이 두려우면서도

계속해서 뭔가를 기다리는, 제 이중적인 마음을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기억은 속수무책 10년 전의 그 때로 자꾸 돌아갔습니다.

 

그 기억 속에는 열대의 나라 싱가폴의 찜통 더위,

막히는 아침 차 안에서도 마냥 행복하던 제가 있습니다.

시내 한 대학 캠퍼스의 1,000년된 고목 아카시 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은빛처럼 흩날리는  작은 아카시 잎새들을 바라보며

고국의 가을을 그리워하는 제 모습도 있습니다.

 

브람스 음악을 언제나 들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바쁜 일상의 걸음을 멈춰 서서 잠시 하늘을 바라보고

래플스 시티 빌딩 숲 사이의 카페에서
클라크 퀘
 레스토랑에서,
운전하던 차 안에서

편지를 쓰는 제가 있습니다.

 

전심을 기울여 사랑해주는 한 사람 때문에 행복했던 그때가

어깨 너머로 다가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소통하기 힘들었던 한 남자와 살면서 저 깊숙한 가슴 한 자락에

그리움의 방을 따로 만든 슬픈 한 여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 여자에게 인생은 참으로 힘들고 때로는 울음 밖에는 출구가 없는 막막한 것이었다가  

거리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보겐빌리아 빨간 꽃들에게 무한히 감탄하며

살아있음을 감사하는 아름다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 때 살아있음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받고 있음에 대한 자각, 그 자각이 갖는 힘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0년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이지만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내 추억의 그림 속에 한 남자는

새벽 산책 후 이른 출근 길에 사직공원에 자신의 승용차를 세워두고

타국 만리에 떨어져있는 한 여인에게 그리움에 젖은 목소리로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 그는 이른 아침,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에서 긴 편지를 씁니다.

 

그의 해박한 음악 지식과 글, 말 솜씨는 장르의 경계가 없습니다.

내 기억 속의 그의 글은 인문학의 향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도도하고 거침이 없습니다.

당시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내가 그에게 마음이 열렸던 것은

어쩌면 그의 글 솜씨와 말솜씨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음악을 향해 타오르는 정한으로 가득했던 그는 할화산처럼 뜨거웠습니다.

그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안으로 뜨거웠던 것은

먼 이국에 소재하던, 그림자에 불과한 나를 향한 갈증이라기 보다 

그 자신 안에 갇혀있던 자신만의 근원적 그리움이 나를 매개로 그 안에
사정없이 타올랐기 때문이라는 걸 저는 모르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안의 자기 그림자를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 날들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타오를 수 있었던 자신들에 대한 경외 때문일 것입니다.

 

그와 나는 현실의 무게를 타고 지난 10년 서로 너무 멀리 걸어왔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도 우리가 함께 걸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수 없는 지리적인 장벽을 핑계로 안전한 만큼만 서로를 향해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같은 서울 하늘 아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감기처럼 며칠 앓고 나니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 앞이 보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내 울타리 안에, 실은 누군가를 다 들여놓지 못하는 이기주의자입니다.

그에게 마음 문을 열어주고 함께 상처받는 길을 택할 내가 아닙니다.

그 당시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이해했을까 생각해봅니다.

서로 알고 싶은 만큼만, 서로 알고 싶은대로 알았던 것을 잘 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나는 일상의 단어들로 그가 어떤 사람이란 걸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으며, 같이 나눠 가진 시간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아마 더 열고 들어가면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는 음악에의 몰입을 잠시 내게로 옮겨 놓았고

나 역시 무언가의 몰입을 그에게로 잠시 옮겨놓았던 것 뿐입니다.

 

그를 내 안에, 내가 아는 사람으로 그냥 두려고 합니다.

아마 가끔, 아주 가끔은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전화기에 손을 얹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마다 한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내 손을 막을 것이고 아직은 더 중요한 다른 일들이 내 안의 갈등을 떨칠 것입니다.

 

이제 언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런지 나도 알 수 없습니다. 

 

IP *.240.107.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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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12.24 14:20:45 *.127.99.9
정작 써야 할 글이 손에 안잡히는 걸 보면 '아직 그 책은 내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조금씩 듭니다.
그래서 이렇게 또 딴 짓을 합니다.
이번주는 제가 그동안 쓴 모닝페이지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거기에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것이 있지 않을까,
무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어찌되었든 유구무언,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겠지요).


프로필 이미지
부지깽이
2008.12.24 22:43:14 *.160.33.149


네 치명적 단점이 무엇인지 아느냐 ? 
네가 무엇을 넘어서야 하는지 아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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