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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6일 02시 23분 등록
 

궤도수정(3)


  “야! 이놈아. 니가 휴지냐 덤으로 끼워 팔게….”

  담임선생님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데 오죽하실까. 열중 쉬 엇 자세를 한 아이들은 튀어나오는 웃음을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고개를 숙이고는 실룩대고 있었다. 웃음이 많은 경관이 녀석은 입을 꼭 다물고 참아보려 안간힘을 쓰다 끝끝내 콧구멍에서 이상한 것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애이 추잡한 넘’ 그 모습을 본 현묵이가 아프지도 않은 배를 움켜잡고는 주저앉았다. 전국기능경기대회 우리학교 대표 선수 출신인 서경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같은 놈하고 굴비 역이듯 하는게 드럽게 쪽팔린가 보다. 아~~ 정말 돌아버릴 시추에이션이다.


  “뭘 그렇게 웃어 이놈들아! 니들이나 이 녀석이나 다 그놈이 그 년여.”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그래도 구세주는 담임선생님이다.

  “여기 일 곱 명은 내일까지 이력서 들고 10시까지 교무실로오고 홍스 넌 남아라.”

  또 무슨 쿠사리를 주려고 나만 남고 애들은 가라고 하는지. 오늘 정말 스타일 다 구기는 날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빽이나 따라가는 건데. 번지수 잘못 찾은 것 같다. 정말 오늘은 빽이 부럽다. 아이들은 인사를 하고 나가기 시작했다. 경관이와 현묵이 두 녀석은 끝끝내 나에게 무언의 눈치를 줬다. ‘잘 해봐라 홍. 그냥 우겨봐. 그거 니 주특기잖아.’ 귀로는 들리지 않았지만 두 녀석이 내민 주먹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옆 책상의 의자를 끌어다 놨다.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며 의자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선생님은 나를 앉혀 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그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홍스. 니 말대로 끼워 팔기로 가보자.”

  선생님은 의외로 웃으면서 말을 시작했다.

  ‘앗싸. 이제 나도 취업이란 걸 하는 구나.’하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난 두 손을 무릎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고개를 무릎에 닿을 만큼 푹 숙이며 나름 큰소리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근데 말이다. 니가 그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 먼저 온 일 곱 명 중에서도 몇 명이 정식 직원으로 일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 회사 사장님 말이 일단 오고 싶다는 아이들은 다 보냈으면 해서 보내는 거니까 가서 면접 잘 보면 수습사원으로 라도 다닐 수 있을 꺼다.”

  선생님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아까의 쪽팔림이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갈 수도 있었는데 괜히 애들한테 내 치부를 또 확인시킨 선생님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렇지만 티를 내긴 싫었다.

  “네. 알겠습니다.”

  내 짧은 말이 끝나고 선생님은 잠깐 동안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그 다음 나올 말이 꽤 길어지겠다는 감이 왔다. 선생님이 진지 모드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홍스야. 끝까지 남아라. 난 니가 공부를 못하고 자격증도 없는 아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보다도 선생님은 니가 참 질긴 놈으로 기억하고 있다. 학교 성적과 자격증은 이미 지나간 과거다. 잘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회는 헛똑똑이 보다 묵묵한 사람을 원한다. 그러니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여도 그 일을 묵묵히 해라. 일이 어려워 할 수 없거든 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계속 시도하고. 그러다 보면 뭔가가 보일 것이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인 거 알지. 그렇게 하려면 넌 지금 다른 아이들 보다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꺼야. 그럴게 할 수 있지. 선생님은 니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꺼라 믿는다.”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뭐 또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하나 싶었다. 선생님들 이야기는 다 그러니까. 그러나 뒤로 갈수록 나는 고개를 들을 수 없었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해준 것은 입학하고 처음이었다. 아니 그 누구로부터도 진심어린 격려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기분이 참 묘하다. 맛있는 걸 얻어먹은 것도 아니고, 그냥 말을 들었을 뿐인데. 선생님이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줄 줄은 몰랐다. 감동 먹어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그리고 다짐했다. ‘그래 똑똑하단 소리는 못 들어도 질기다는 소리는 들을 수 있어. 뭐 내 인생 자체가 소심줄이까.’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를 일으켜 새우고는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꽉 잡았다. 

  “다른 애들과 함께 이력서 들고 와.”

  

  선생님의 마지막 말에 난 아무 대답도 못했다. 그냥 멈 짓 하다가 꾸벅 인사만 하고 교무실을 도망 나오 듯 빠져 나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럴 때 고맙다는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란 놈은 왜 이렇게 소심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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