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어니언
  • 조회 수 829
  • 댓글 수 4
  • 추천 수 0
2024년 7월 18일 12시 51분 등록

얼마 전, 라디오 방송에서 나올 법한 착한 일을 했습니다.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고 있는데, 멀리서 모르는 아이가 제 쪽으로 뛰어오더니 바로 옆에서 넘어졌습니다. 아이가 주저앉아서 엉엉 우는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이 부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제 아이가 어디 밖에서 저렇게 울고 있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았습니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이 눈물을 닦아주고 좀 진정시킨 다음에 부모님이 어디 계시는지 물어봤는데 아이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계속 울먹였습니다. 그래서 일단 가장 가까이 있는 놀이터로 가보자고 하고 아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한 손으로는 모르는 아이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우리 아이 유모차를 끌며 걸어가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필이면 그때 전신 검은색 옷을 입고 검은 모자도 눌러쓰고 있어서, 순진한 꼬마 아이에게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놀이터에 아이 부모님이 안 계시면 어디로 가야 할지, 우리 아이가 그 사이에 집에 가자고 칭얼대지는 않을지.. 하는 걱정에 머리가 복잡한데, 그 아이 표정을 보니 아직도 넘어진 아픔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다른 생각은 멈추고 제가 어릴 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또 신기하게 아이가 울먹임을 멈추고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놀이터에 가니 다행히 아이 어머니가 깜짝 놀라면서 아이를 마중 나왔습니다. 보아하니 큰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걸 혼자 둘 수는 없고 둘째도 아마 혼자 놀 수 있겠다 싶어서 약간의 자유를 주었는데 그만 엄마가 없는 곳에서 넘어졌던 모양입니다. 감사 인사를 받고 아이와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오는데, 세상에, 제가 너무 멋진 어른같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어릴 때 상상했던, 아주 이상적이고 멋진 미래의 내 모습을 실현시킨 것 같아서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아들에게도 ‘야 엄마 봤냐. 멋있지?’하고 유모차에 귀엽게 누워있는 5개월 아기에게 자랑도 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니 낯선 사람들의 선량한 눈빛과 호의를 마주할 일이 꽤 많이 생깁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기에게 인사를 건네고, 무거운 문을 열고 기다려주거나, 엘리베이터에 유모차 공간을 만들어주거나 아기를 예쁘다고 칭찬해 주거나, 엄마가 기운 내야 한다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대상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아저씨들입니다. 무뚝뚝한 중년 남성의 얼굴이 아기를 바라보며 어디까지 부드러워질 수 있는지를 목격하면, 엄청난 온도 차이에 꽤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전국의 무뚝뚝 아저씨들에게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크게 얻었습니다.


사실 ‘호의’라는 단어는 좋아 보이는 이미지에 비해 오해받거나 이용당하는 걸 주의해야 한다는 표현이 많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호이인 줄 안다’라거나 ‘쓸데없는 호의는 무관심보다 더 나쁘다’ 같은 말을 많이 들어왔었죠. 그러나 호의 그 자체는 크든 작든 순수하고 빛나는 마음입니다. 한국 문화에서 쓸데없이 실실 웃거나 얕잡아 보이면 안 된다거나 혹은 기타 여러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마음속에 호의 스위치를 끈 채 살아가지만, 한 번 ‘달칵’하고 스위치가 켜지면 어두운 방이 환해지는 것처럼 주변이 밝아집니다.


사람들의 호의가 눈에 보이게 된다면 그건 아마 반짝반짝 빛나는 꼬마전구 같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꼬마전구들을 멋진 전나무 트리에 장식하면 매일매일이 크리스마스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호의 스위치를 모두 눌러버리는 아기들이 만나는 세상은 언제나 크리스마스처럼 마음이 들뜨는 즐거운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무뚝뚝한 아저씨라도 아기 앞에서는 무장해제 당하고 마니까요.


이 아이가 성장하면 호의라는 단어는 호이가 되지 않기 위해 아껴야 하는 것으로 덮어써지겠지만, 그래도 아직 아기일 동안은 마음껏 호의의 반짝임을 만나게 해주고 싶습니다. 혹시 길에서 어린 아기를 본다면 마음속 전구에 불을 켜주세요. 아기는 그 일을 기억하지는 못해도 누구나 마음속에 ‘호의’가 있다는 걸 믿을 수 있게 말이지요.

IP *.166.87.118

프로필 이미지
2024.07.18 13:24:50 *.97.54.111

아기들을 보면 미소가 나올 수 밖에 없고
육아에 힘들 엄마들을 보면 안쓰럽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2024.07.24 20:09:13 *.7.231.158
모두가 같은 마음이군요. 힘낼게요!
프로필 이미지
2024.07.19 09:42:59 *.132.6.13

에레베이터 속의 그 아저씨류인 제가 참 좋게 느껴지는 오늘입니다. ㅎ

프로필 이미지
2024.07.24 20:10:12 *.7.231.158
ㅋㅋㅋㅋㅋ 아저씨의 미소는 희귀하고 따뜻했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7 [수요편지] 행복 = 고통의 결핍? 불씨 2024.07.10 748
36 [목요편지] 흉터 [2] 어니언 2024.07.11 768
35 [내 삶의 단어장] 피아노, 희미해져 가는 온기 [1] 에움길~ 2024.07.16 768
34 [수요편지] 불행피하기 기술 [3] 불씨 2024.07.17 819
» [목요편지]’호의’라는 전구에 불이 켜질 때 [4] 어니언 2024.07.18 829
32 [책 vs 책] 무해한 앨리스 화이팅! file [2] 에움길~ 2024.07.22 804
31 [수요편지] 일해야 하나, 놀아야 하나 [2] 불씨 2024.07.24 925
30 [목요편지]취향의 기원 [2] 어니언 2024.07.25 881
29 [내 삶의 단어장] 알아 맞혀봅시다. 딩동댕~! [1] 에움길~ 2024.07.30 857
28 [수요편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 [1] 불씨 2024.07.31 977
27 [수요편지] 형세 [3] 불씨 2024.08.07 749
26 [목요편지] 식상해도 클리셰는 살아남는다 [7] 어니언 2024.08.08 937
25 [내 삶의 단어장] 다래끼, 천평 그리고 지평 [2] 에움길~ 2024.08.13 1110
24 [내 삶의 단어장] 크리스마스 씰,을 살 수 있나요? [1] 에움길~ 2024.08.20 694
23 [수요편지] 문제의 정의 [1] 불씨 2024.08.21 734
22 [목요편지] 장막을 들춰보면 어니언 2024.08.22 728
21 [책 vs 책] 어디든, 타국 [1] 에움길~ 2024.08.26 797
20 [수요편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1] 불씨 2024.08.28 709
19 [목요편지]학교 밖의 지식 어니언 2024.08.29 769
18 [목요편지] 두 개의 시선 [1] 어니언 2024.09.05 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