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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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데리고 처음으로 장거리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양양까지 꽤 먼 거리인데도 의젓하게 다녀온 아기가 대견했습니다. 양양에서 아기는 집에 있는 욕조보다 커다란 수영장에서 물장구를 치고, 또래 친구를 만나고, 바다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집에만 있을 게 아니라 큰 물에서 놀 기회를 만들어줘야 겠습니다.
자식의 입장이 아니라 부모의 입장에서 가족 여행을 가본 것은 저에게는 시점의 전환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익히 알고 계시는 것처럼 저희 아버지는 저와 언니가 어릴 때부터 여행을 자주 데리고 가주셨습니다. 몇몇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저희 가족은 계림 근처의 어딘가에서 복숭아를 깎아 먹고, 줄지어 서서 해인사 대장경판을 문틈 사이로 바라보았습니다. 딸로서 저는 여행에 즐겁게 참여했고, 아직까지도 여행의 몇 장면을 따뜻한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저희를 거기 데려가셨던 걸까요? 또 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왜 하필이면 유적지를 많이 갔을까요? 혹시 아버지께서 사학과를 전공하신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짐작해 봅니다. 한 번도 전공과 여행의 관계를 이야기하셨던 적은 없지만, 아무래도 사학과는 역사를 공부하고 답사도 많이 다니니 다양한 유적지를 이미 가보셨지 않을까 이제서야 생각이 미칩니다. 그래서 딸들이 자라니, 예전에 가보았던 멋진 곳들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 즐겁게 여행 계획을 짜셨을 것이라고 뒤늦게 아버지의 속마음을 헤아려봅니다.
아이를 낳아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지나간 순간들을 부모님의 입장으로 다시 한번 되짚어볼 수 있는 전환의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내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알게 되면서, 나를 보는 부모님의 시선도 짐작해 볼 수 있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시선의 전환입니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누구나 거의 비슷할 테니까요.
여행 이외에 다른 예도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 조별 과제를 망친 일을 쓰디쓴 실패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아버지께서 써주신 편지에, 부모님이 보기에 이 실패는 ‘협동을 이끌어내는 연습’이나 ‘다음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라고 하셨습니다. 막상 편지를 받았을 때에는 단순히 저를 위로하려고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했었는데, 짧게나마 아이를 키워보니 아이가 어려움을 딛고 더 성숙하고 노련해지길 진심으로 기원하는 마음을 약간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마음 깊숙한 곳에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겠습니다만, 무한 경쟁이 일상인 한국 사회에서 경쟁에 능숙하지 않은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경험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보는 시선이 나의 관점 하나였다가 부모의 관점까지 두 가지로 증가하는 것,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이 두 가지 관점이 저의 장점을 장려하고 단점을 끌어안을 수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저는 엄마가 되면서 제 아이와 제 마음속의 나 자신이라는 어린아이를 안아줄 수 있는 힘을 얻은 것 같습니다.
저는 ‘나’를 온전하게 만들 수 있는 여러 기회 중 하나가 육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아기를 통해 내가 잊어버렸지만 분명히 지나왔을 나의 유아기를 재구성하고, 나를 키워준 부모의 마음을 짐작해 보는 것은, 성인이 된 후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증명하는 지난한 과정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여주고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한 생명을 키워내는데서 오는 경이를 느끼게 해줄 뿐 아니라, 내가 잊어버린 무수한 응원과 축복을, 그리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육아의 멋진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가족 여행 덕분인지, 언니도 조카들을 데리고 여행을 자주 다니고, 저는 국사와 국내 여행지를 공부하며 앞으로 아이와 가고 싶은 곳 목록을 적고 있습니다. 제 아이도 가족 여행을 기억해 주겠죠? 즐거운 장면 몇 가지를 마음에 담을 수 있다면 아주 좋은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 추천해 주고 싶은 곳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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