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라현정
- 조회 수 3702
- 댓글 수 2
- 추천 수 0
Tochigi by Setsuko Miyashiro
왜 그런 얼굴인 거니? 야옹.
세상이 곧 망할거래. 세상이 다 망할 건데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망하는 세상 앞에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쟎아. 그러니까, 제길, 공부라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그리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던 거야.
모두 다 망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 동안 나를 질투 나게 만들었던 그들이 모두 생각난다.
규동이 그 자식, 고시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드디어 외교관이 됐나 봐. 얼마 전, 학교에 와서는 고시실에서 아직도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한테 이것저것 충고를 하더라구. 예전에 같이 공부하던 동기들이 규동이한테 기 죽어 있는 꼴을 보니 예전에 규동이가 그들한테 하던 게 생각이 나서 화가 났어. 암튼, 그 자식 너무 맘에 안 들었어. 공부할 때는 굉장히 이기적이었거든. 다른 친구들 노트를 몰래 훔쳐다가 몰래 보는 것은 예사였고, 자신이 알던 정보는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절 함구했어. 그리고 나중에는 최고의 답안을 썼지. 그 때 사귀던 여자 친구에게는 또 어땠구? 쟤 놈 힘들 때는 직장 생활하는 그녀를 이리 오라 저리 오라 맘대로 부렸고, 나중에 고시 공부가 끝나면 외교관 부인 시켜줄 테니까 미리 신경 좀 쓰라고 해서 여자 친구 월급의 상당 부분 썼을 거야. 그 놈처럼 나쁜 놈들의 다 그렇듯이, 합격한 후, 딱 한 달 만에 여자 친구를 바꿨어. 경제부 장관집 딸이랬지 아마. 새 여자 친구가. 그 놈 인생 정말 이제 쫙 고속 도로 였는데, 안 됐다. 안 됐어. 세상이 망하면 그냥 모든 게 사라질 텐데, 그것도 나랑 같이.
상규, 그 자식은 항상 너무 즐거워. 뭐가 그리 즐거운지 말야. 난 그 자식을 보면 질투가 느껴졌
어. 왜 그런 것 있쟎아? 나는 그렇지 못한데 혼자서 즐거운 것 같은 그 자식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갑자기 심술이 나고 아무 이유 없이 그 자식에게 나쁜 일 좀 하나 일어났으면 하고 바랬었어. 그
자식 항상 만면에 웃음을 뛰고 여유롭게 행동을 하는 것을 보는 게 정말 질투가 났었는데. 게다
가 얼마 전에는 예쁜 여자 친구까지 생겼더라구. 그 자식 입이 귀에 걸리도록 또 웃는데, 난 왜
그 자식이 미웠는지 모르겠어. 잘 생겼지, 똑똑하지, 어머니 아버지 모두 근사하시지. 집 안의 명
예에 걸맞게 적당한 부를 갖춘데다가. 부족한 게 너무 없어. 그 자시 곧 유능한 은행가로 성장 하
겠다는 것이 훤히 눈 앞에 보이 더라구. 며칠 전 그 자식이 그 예쁜 여자 친구랑 손 잡고 지나가
는 걸 우연히 봤는데. 세상이 망한다는군.
재식이도 있구나. 그래, 그 놈이 망한다고 하면 좀 안타깝긴 하다. 집 안도 좋지 않고, 가진
것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생긴 것까지 시원 챦은 그 자식은 아무도 안 알아주는 그 ‘공부’라는
게 그게 구원이야. 짜식 뭐가 좋다고, 맨날 밤 세워 책을 읽으면서도 헤헤거렸어. 자신은 공부가
밥이래. 서당에서나 읽었을 법한 이상한 책들을 옆구리에 껴 가지고 다니면서 우릴 만나면 그 신
이 난다는 듯 새로 발견한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지. 그러니까, 그 놈의 자식에게는 그냥
또 다른 세상이 하나 있었던 거야. 그 놈도 곧 나랑 같이 망한다는 군.
나? 이것 저것 해 봤는데 매번 잘 안 됐었어. 세상이 나한테 호의적이지 않았거든. 어렵게 취직을
했었는데 회사가 망했고, 좋아하는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3년을 쫓아다녀도 끝까지 내가 싫대.
머리도 나빠서 공부도 잘 하는 것 같지 않고, 친구들하고도 왠지 거리가 느껴져서 어쩔 땐 외톨
이 같거든. 세상은 왜 나를 이렇게 미워하는지 모르겠어? 부모님은 나 같은 자식을 둬서 부끄러
우신 눈치고. 그래서 잘 됐지 뭐야. 가까운 시일 내에 세상이 망한다는 것은 정말 내 인생에서 가
장 멋진 일이 일어나는 거야. 그것도 질투 나는 그 친구들과 함께 망한다는 것은 어쩌면 진짜 내
인생에 가장 멋진 일 일거야. 그런데, 세상이 망하면 어디로 갈려나? 그냥 끝인가? 영화가 끝난
것처럼 그냥 ‘끝’하고 끝나는 건가? 그런데 고마워, 초록 고양이. 내 이야기 모두 듣고 도망가지
않아 줘서 정말 고마워. 너 때문에, 나, 처음으로 세상이 좀 더 늦게 끝났으면 하고 바라기 시작
했어.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972 | 마흔을 넘어 [10] | 書元 이승호 | 2009.07.19 | 3259 |
971 | 마흔 세살의 미래의 나 [18] | 혁산 | 2009.07.20 | 3260 |
970 | 나비칼럼 No.8 – 전업주부열전 [13] | 유재경 | 2011.05.22 | 3261 |
969 | 대화 - 진작 말할 걸... [12] | 혜향 | 2009.07.20 | 3262 |
968 | [17] 신기술의 허와 실 [7] | 정산 | 2008.08.11 | 3267 |
967 |
한 번의 상처가... ![]() | 이은미 | 2008.10.06 | 3269 |
966 |
8월 12일 5일째 말라가 - 미하스 - 세비야 ![]() | 희동이 | 2014.09.01 | 3270 |
965 | 컬럼2-5: IT, 현대판 문방사우 [4] | 희산 | 2010.05.12 | 3271 |
964 | 편집이 글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7] | 홍승완 | 2007.10.03 | 3272 |
963 | 사자1 - 교류 첫번째 단계/ 대상 깊이 바라보기 | 정예서 | 2009.11.09 | 3273 |
962 | [14] 역사와 혁명 [9] | 창 | 2008.07.20 | 3275 |
961 |
나의 만다라 ![]() | 콩두 | 2012.10.02 | 3275 |
960 | [06] 보험 설계사를 위한 변명 [7] | 거암 | 2008.05.12 | 3284 |
959 | [24] 욕망, 행복 그리고 재무설계 [5] | 거암 | 2008.10.11 | 3285 |
958 | [32] 직업관 만들기 (3) [2] | 최코치 | 2008.12.28 | 3288 |
957 | 응애 5 - 죽음의 미학 ( Ars moriendi ) [5] [1] | 범해 좌경숙 | 2010.04.19 | 3288 |
956 | 인류와 나, 우리들의 과거 속 빛나는 장면들 [4] | 海瀞 오윤 | 2007.06.03 | 3291 |
955 | [23] 새벽 바다 [6] | 창 | 2008.09.29 | 3295 |
954 | 첫 문장, 어떻게 써야 할까? [2] | 홍승완 | 2007.07.23 | 3296 |
953 | [칼럼42]아차! 아차산 역 [1] | 素田최영훈 | 2008.01.28 | 32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