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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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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20일 01시 03분 등록
 

   11월이 되면서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출근시간 지하철 신촌역을 빠져나와 동교동 사무실까지 가는 길이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찬 기운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 눈을 점점 더 작게 만든다. 어제 시험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반 친구들은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대부분 기대와 다른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이미 몇몇 아이들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고, 경관이와 경수는 대학입시 준비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정한 것 같다.


  사무실 문을 열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손이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쪽을 살폈다. 경리누나 혼자뿐이다. 이제 막 청소를 시작하려는 듯 걸레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습관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안녕. 일찍 나왔네. 어서 와.”

  경리누나의 한쪽 손에는 걸레가 들려 있었다. 누나는 걸레 잡은 손으로 옷소매를 치켜 올리며 이상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근데 왜 너 뿐이니.”

  나밖에 없어서 그걸 물었겠지만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혹시나 했던 일은 역시 벌어지고 만다.

  “글쎄요. 아직 오고 있나 봐요. 저는 애들하고 방향이 달라서요.”

  이렇게 말하고는 오늘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10분이 지났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경리누나는 간단히 청소를 끝내고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지난달에는 다른 학교 애들이 왔다 갔었는데, 그 시험인지 뭔지를 본 다음날 아무도 안 나타났었거든. 그래도 이번엔 한명은 왔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거니 아니면 너가 무딘 거니.”

  경리누나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내가 뭐가 무디다는 건지 모르겠다. 짤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하고 나왔을 뿐이다. 물론 실습기간 동안 실습비를 줄 수 없다는 사장님의 말에 실망 하긴 했지만, 3개월 정도니까 학원 다닌다는 샘치고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나오긴 했는데 정말로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 줄은 몰랐다. 내가 정말 무딘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님이 오셨다. 예상이라도 한 듯 사장님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나타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홍스라고 했지.”

  사장님은 별 감정도 실리지 않은 평범한 어투로 말을 던졌다.

  “네.”

  나는 짧고 굵게 대답했다.

  “어제 이야기한 조건을 수용할 수 있겠나. 정말로 실력이 되기 전까지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 물론 그 기간 동안엔 점심도 니가 해결해야함은 물론이고, 난 아무것도 가르쳐 줄 것이 없다.”

  사장님의 말은 단호하다 못해 꼭 나를 내쫓으려고 하는 말처럼 들렸다.

  “니 실력을 보니까 컴퓨터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더군다나 그 흔한 제도자격증도 없이 할 수 있겠나.”

  옆에서 이 광경을 보며 걸레질을 하는 척하던 경리누나의 눈길이 나와 마주쳤다. 누나는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하지 말라는 그녀의 싸인을 받고 아차 싶었다. 어쨌든 나는 판단을 해야만 한다. 나에게 가장 큰 약점이자 강점은 생각하는데 별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생각은 무슨 놈에 생각. 난 그냥 내질렀다.


  “할 수 있습니다. 평가는 3개월 후에 내려 주시구요. 그 기간 동안 어떻게든 일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들어 놓겠습니다. 컴퓨터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솔직히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기계제도는 자격증만 없을 뿐 기본적인 것은 할 줄 압니다. 자격증이 실력은 아니잖습니까? 3개월 후에 사장님 맘에 들지 않으시면 그땐 사장님께서 잡더라도 제 발로 걸어 나가겠습니다.”


  난 최후 진술이라도 하는 것 같은 비장함으로 내 의지를 보였지만 속으로 무지 떨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나간다고 더 좋은 곳은 나에겐 없다. 어디든 마찬가지일 것이고 어쩌면 이것이 나에겐 더 큰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 이 녀석 보게. 제법 당돌한 구석이 있네.”

  사장님은 무뚝뚝한 인상에서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산도적이 따로 없는 덩치의 손바닥이 내 등에 와 닿을 때의 육중함에 움찔하며 나는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좋아. 니 말대로 그렇게 해보자. 지금부터 3개월 동안 난 너에게 이 사무실과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 그러나 그 이외에 아무것도 지원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니가 알아서 하는 거다.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일단 믿으마. 그 배짱이 맘에 든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싸. 취직했다.’

  어쨌든 사무실에 와서 하는 거니까 취직은 취직인거지 뭐. 옆에 있던 경리누나가 속으로 혀를 차는 모습이 보였다.

  이 소식을 빽이 알면 뭐라고 할까? 순간적으로 빽이 생각났다. 이 녀석 지금쯤 뺑이치고 있을 텐데. 노가다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아무튼 혼자는 외롭다. 몰라도 같이 모르면 덜 쪽팔리고, 함께 하면 덜 힘들 것 같다. 이 녀석이 나와 함께 해줄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지금은 그녀석도 나도 혼자가 된 신세다. 그러나 빽이 혼자의 외로움을 더 먼저 겪고 있으리라.


  “사장님. 제가 친구를 데려오면 함께 하게 해주세요. 원래 세 명 뽑기로 하셨잖아요.”

  난 사장님께 다짜고짜 부탁부터 했다. 아무래도 사장님 스타일이면 그렇게 하라고 할 것 같아서 앞뒤 다 생략했다.

  “그래. 조건은 니가 잘 아니까. 하겠다고 하면 데리고 와봐.”

  사장님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싫지 않은 눈치였다.

IP *.38.24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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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처럼
2009.01.20 03:10:21 *.220.176.158
아자 아자 아자 ......

홍스의 그 젊은날을 위하여..!!!!

악의 구렁텅이(?)에 빠질 그 벗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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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21:01:08 *.38.102.222
잘 읽힌다. 송년회때 여장하고 춤추던 홍ㅅ의 구여운 모습이 자꾸 겹쳐설랑. ㅎㅎㅎ 설 잘 보내고, 복도 많이 받고, 어여쁜 각시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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