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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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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3일 06시 01분 등록


9살 때만 하더라도 나의 집은 제법 유복했었다. 넉넉한 집안 사정과 여유로운 부모님 아래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은 웬만큼 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푸릇푸릇한 잔디가 깔려져 있는 넓은 마당이 있는 2층집. 나는 학교가 파하면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놀았다. 친구들은 넓은 우리집을 좋아했다. 잔디 위에서 우리는 고무공으로 야구를 했고, 축구를 하였으며 엄마는 땀 흘리는 우리들에게 시원한 오렌지 쥬스와 제과점 빵을 간식으로 내 주셨다. 우리는 2층 내 방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가지고 있던 다양한 프라모델과 무선 자동차, 탱크를 가지고 놀았다. 우리들의 놀이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되었으며, 매일 매일이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 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9번째 나의 생일날. 나는 많은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하였다. 집은 아이들로 가득하였다. 엄마는 케익과 빵, 그리고 갖가지 과자, 떡, 음료수를 준비해 주셨다. 먹성 좋은 우리들이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음식들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음식들이 계속 추가되어 우리들의 작은 배는 점점 불러올 수 밖에 없었다. 우리들은 서로 누가 더 많이 배가 튀어나왔느지 만져보고 비교해가며 웃고 즐거워 했다. 아빠는 나와 친구들을 위해 독특한 선물을 준비해 주셨다. 바로 샴페인이었다. 아빠가 직접 멋드러진 솜씨로 샴페인을 ‘펑’하고 터트려 주실 때에는 나와 친구들 모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잔에 담긴 샴페인의 아름다운 색깔과 탄산으로 인한 거품, 방울 그리고 시원하게 코를 찌르는 그 알싸한 향기는 우리들을 마치 어른이 된 것 마냥 흥분시켰다. 하지만 생각보다 맛은 좋지 못했다. 굉장히 달 것으로 예상했었지만, 오히려 씁쓸한 맛이 더 강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른들의 세계에 한걸음 접근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직접 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우리들은 취...했....다..... 아무리 낮은 도수라도 샴페인은 엄연한 주류였던 것이다..... 1,2시간은 잤나보다. 깨어보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노을빛이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곧 어둠이 찾아올 것이었다.

얼마 뒤 집안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 가구들에 온통 빨간 종이가 붙어 있었다. 집안이 엉망이었다. 엄마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하지 않고 한숨만 쉬신다. 저녁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엄마에게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엄마는 아무 말없이 울기만 하신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를 다그친다. 나는 엄마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같이 울었다. 엄마도 울고, 나도 울었다. 엉엉 무엇이 서러운지도 무엇 때문에 우는 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마의 울음은 나를 더욱 세차게 울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울다가 울다가 잠이 들었다.

잠결에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엄마의 자상스런 손길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꿈이라 생각했다. 아니 꿈일 것이라 믿고 싶었다. 이마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엄마의 손길이 너무 따스하다. 세심한 손길이 나의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매만져 주고 있었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떠지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를 보고 싶었다. 엄마를 안고 싶었다. 하지만 웬지 모르게 몸이 천근만근 움직여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몸 위에 올라타 있어 옴짝달싹 못하게 나를 누르고 있는 듯 느껴지기만 했다. 그때 내 이마 위로 무언가 차가운 액체가 ‘툭’ 하고 떨어졌다. 움찔했다. 하지만 역시나 눈도 몸도 내 마음과는 반대로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더 정체모를 액체가 이번에는 내 볼로 떨어졌다. 떨어진 액체는 수백개의 파편이 되어 내 얼굴 전체로 퍼졌다. 웬지 모르게 시원했다.

“상..우..야......................, 엄마 말............... 잘 들으............렴................”

어렴풋하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 속에서 말하는건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엄...마....가................. 흑흑...... 우리... 상우............. 불쌍한..... 우...리............. 상우........................................................”

난 엄마를 위로해 드리고 싶었다. 울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왜 우냐고 묻고 싶었다. 내가 엄마를 꼬옥하고 안아 줄테니 어서 눈물을 그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본드칠을 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뻗어 엄마 손을 잡고 싶었다. 엄마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내 눈에서도 액체들이 모여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엄마의 손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멈추어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흐르고 끊임없이 닦아주고.... 다시 엄마의 말소리가 흐느낌과 함께 들려왔다.

“불쌍한.... 내...새끼.... 내... 강아지...... 널 놔두고..... 어떻............게..... 흑흑흑............”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이것은 얕은 꿈이고 이제 본격적인 꿈의 세계로 들어서면 엄마가 울지 않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나와 엄마는 같이 즐겁게 웃으며 뛰어 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 점점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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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9.02.03 12:29:25 *.105.212.78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야기로구나.. 난 어떤 글을 읽을때마다 그 장면이후를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때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펼쳐져서 애써 떨쳐버리는 경우가 많거든.. 다음편을 또 기다려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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