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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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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15일 08시 27분 등록


눈을 떴다. 하지만 꿈은 꿈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고, 현실에서 꿈은 신기루와 같았다. 나의 즐거웠던 추억은 마치 꿈 속의 추억처럼 자고 나면 바로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꿈은 말 그대로 꿈이었고, 현실은 더할 나위없이 차가웠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명제였다.

어느날 늦은 밤. 잠이 든 상태에서 누가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지독한 담배 쩔은 내와 술 냄새 그리고 거친 수염이 내 얼굴을 마구 할퀴듯이 핥고 있었다. 깊이 잠들어 있는 나를 현실의 세계로 끌어내고 있었다. 아빠.. 그랬다. 온갖 세상풍파의 저린내를 가득 담고 있긴 했지만, 그것은 아빠였다.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아빠~!!"하고 부르며 아빠의 품에 안겼다. 아빠의 몸은 차가웠다. 손은 거칠었다.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우리 상우, 아빠 많이 보고 싶었니?"

아빠의 목소리는 힘이 없는데다 갈라지고 있었다.

"응. 아주 많이 많이 보고 싶었어. 근데 아빠 그동안 어디 있다 온거야? 왜 이렇게 늦게 온거야?"

나는 금새 울먹울먹 해졌다.

"응~ 아빠가 요즘 하는 일이 너무 바빠져서 집에 자주 오기가 힘들어졌어. 아빠도 상우가 많이 보고 싶었는데, 일을 하려니 어쩔 수 없었어. 아빠 마음 상우도 알지?"

나를 바라보는 아빠의 눈에 물기가 서린다. 나의 이마 위에 머리카락을 훔치는 아빠의 손길이 떨림을 느낀다.

"그래도 나 보고 싶으면 집에 와야지. 아빠는 일이 더 중요해 내가 더 중요해? 응, 응?"

갑자기 떼를 쓰고 싶어진다. 어리광도 더 부리고 싶어진다. 괜시리 아빠가 미워진다. 변명만 늘어 놓는 아빠는 진정한 우리 아빠가 아니다.

"물론 상우가 더 소중하지. 아빠는 이 세상 무엇보다 상우가 제일 소중하단다. 누가 돈을 이따만큼 갖다줘도 싫고, 금 덩어리를 트럭으로 갖고 와도 상우와는 안 바꿀거야. 아빠는 하늘보다도 땅보다도 더욱 더 상우가 중요해.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에게도, 바다에 있는 용왕님에게도 맹세할 수 있어."

"그래? 그러면 이제 매일매일 집에 일찍 들어와. 그리고 나랑 같이 재미나게 놀자, 아빠! 알았지?"

기뻐졌다. 아빠가 약속을 해주니 이제 웬지 모를 불안감은 다 사라지는 듯 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즐겁고 재미난 생활이 다시 시작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아빠가 매일매일 일찍 들어와서 상우랑 재미나게 놀아줄게. 참, 상우야. 아빠가 너 주려고 뭐 사왔는데, 뭘까?"

아빠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계셨다. 그것은 바로 군고구마였다.

"와~ 고구마네. 내가 좋아하는 군고구마. 어, 그런데 왜 이렇게 차가워?"

"어~ 아빠가 상우 생각나서 사놓고 어디 들렸다가 오느라 식어서 그래. 아빠가 하나 까줄테니까 먹을래?"

"응! 먹을래."

아빠는 몇 개 되지 않은 고구마 중에서도 특히 큰 놈을 골라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보았다. 아빠의 손이 예전 아빠의 손이 아님을. 아빠의 손은 부르트고 까지고 거칠어져 있었다. 게다가 손톱 아래 깊은 때까지 끼어 있었다. 아빠의 표정 또한 예전 아빠의 그것과 달랐다. 웬지 어두워 보였고,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동안 우리 집안에 내려 앉은 어둠처럼 아빠의 표정에도 그 어둠이 서려 있었다.

고구마는 차디 찼다. 맛있음보다 차가움이 먼저 입안 가득 밀려 들었다. 난 기침을 했다. 목에 사래가 걸리듯 그렇게 기침이 나왔고, 쉽게 멈추어 지지 않았다. 아빠는 부엌으로 가시더니 물을 가지고 오셨다. 그리고 내 등을 살짝 두드려 주었다. 기침이 조금씩 잦아 들었다.

고구마는 많이 매말라 있었다. 수분이 날아가 퍽퍽했다. 하지만 난 아빠를 만났다는 반가움에 그런 것도 다 잊고 고구마를 먹었다. 아빠의 손길이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새벽이었다. 어디선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잠이 들어 있었지만, 그 소리에 잠이 조금씩 조금씩 달아났다. 분명 아빠와 엄마의 목소리였다. 건너편 안방에서 넘어오는 두 사람의 말투엔 가시가 서려 있었다. 서로에 대한 원망과 미움의 감정이 묻어 있었다. 예전에 보았던 금슬 좋던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점점 목소리가 커져갔다. 난 두려웠다. 어서 두 사람이 빨리 언쟁을 그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바램과는 반대로 목소리는 더욱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엄마의 비명소리가 새벽공기를 뚫고 울려 퍼졌다. 다시 아빠의 고함소리와 함께 병 깨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난.. 난... 순간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안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힘껏 열어 제꼈다.....

아빠의 성난 표정... 엄마의 흐느낌... 그리고 엉망인 방안.... 바닥의 유리파편....

아빠와 엄마는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엄마는 고개를 돌렸다. 아빠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 엄마~!! 왜 싸워, 싸우지마, 무서워. 제발 싸우지 마. 나 무섭단 말이야. 왜 싸우는거야. 그냥 사이좋게 지내면 되잖아."

난 울먹였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리고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멈출 수가 없었다. 그냥 선 채로 엉엉 마냥 울기만 했다. 그냥 서럽기만 했다. 무엇이 서러운 건지 무엇이 슬픈 건지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울고 있었다.

엄마가 어느새 다가와 나를 품안에 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도 울고 있었다. 엄마의 눈물이 내 머리 위에 흘러 내렸다. 아빠가 털썩 주저 앉았다. 아빠의 한숨 소리가 방안에 짙게 깔렸다. 난 울다가 울다가 잠이 들었다. 잠이 들어서도 울었다. 슬픈 새벽이었다. 아침이 올 것 같지 않은 어둠 속의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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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9.02.16 14:47:42 *.141.102.50

소심의 근원을 추적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기 때문일까요? 차마 가슴이 아파서 쉽게 읽혀지지가 않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 가슴속에 이런 아픈 추억들이 한두개쯤 있을꺼라는 생각에 공감이 가는군요.. 조금 더 진행상황을 지켜보면서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습니다..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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