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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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는 왜 고행 길을 가려 하느냐?”
사부님께서 지난 오프 수업 때 제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사실 그 말씀이 제게 박혔더랬습니다. 왜지? 왜 그런 걸까?
쉽게 답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제 자신 스스로 설명할 수 없음에도 그 길이 옳은 길이라 여기고 그 길을 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 길이 옳다라는 건 도대체 누가 혹은 어떻게 제 안에 주입된 사실이었을까요…?
오쇼 라즈니쉬의 책 한 권을 읽고 4백 권의 책을 쓴 그를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진리의 본질을 꿰뚫고 있음은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그대로의 덫에 걸려 저 역시 그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습니다. 저의 깨달음이 그의 발 밑에도 따르지 못하기에 제한적 시각으로만 그를 바라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두 가지 깨달음 속에 몇 가지 배움은 얻었습니다.
제가 고행 길을 가려 했던 것은 세상에 지쳐서 외적인 욕망을 니르바나 혹은 깨달음에의 욕망으로 대처했던 것이었습니다. 오쇼의 말을 빌자면 대상만 달라진 똑 같은 또 하나의 욕망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지 못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정화 작용도 거치지 않은 긴장감이 팽배해 있었기에 결코 이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제 눈에도 보입니다.
내친 김에 오쇼에 빗대어 저를 좀 더 살펴보고 싶어졌습니다.
첫째 저는 아직도 수행을 체험이 아닌 기도와 지식 쌓기로만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의식의 체험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기만 시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사회적 욕망은 그대로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고 싶은 분야로 겨우 전환하였기에 사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역시 배고픔이라 표현한다면 오쇼이 시각에서는 1단계의 욕망이 될 수도 있겠고 하고 싶은 일 자체가 문화, 예술계이니 2단계 욕구라 할 수도 있는 그런 어정쩡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직 제 안에는 3단계 영적인 수행 욕구가 그리 강하지는 않다라는 점입니다.
셋째 제겐 변경영에서의 지난 몇 달간의 시간들이 마치 명상을 준비하는 과정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안의 쓰레기를 보고, 치우고 그리고 조용히 침묵 속에서 명상하기. 이제 겨우 제 안에 어떠한 것들이 억압되어 자리를 잡고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버리는 작업은 동료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안에는 너무나 많은 “해선 안돼”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해야만 하는 것들” 또한 “해선 안돼”만큼이나 많습니다. 마주보기도 두렵지만 버리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하고 아직 혼란스러울 때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미약하나마 제 안의 아트만이 아직은 약하지만 신호를 보내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행복합니다. 동료들과 아무 숨김없이 제 안의 이야기를 나눌 때 행복합니다. 사부님과 동료들과 함께 그간 배우고 깨친 것을 토론할 때 또한 저는 행복합니다.
이러한 행복에는 욕망이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한 기대나 집착 없이 그저 행복할 뿐입니다.
지금부턴 어쩌면 무의식까지 그 뿌리를 닿고 있을지도 모를 제 안의 억압과 정면으로 마주보고자 합니다. 혼자라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 버리는 일도 사부님과 동료들을 의지하여 남은 기간 지속적으로 정화 작업을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연구원을 마치는 날, 세상을 향해 두려움 없이 제 목소리를 외치도록 하겠습니다.
오쇼의 말처럼 언제까지 사부님 그늘에, 동료들의 울타리 안에 안주할 수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헤어짐 역시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변경영. 이 곳은 제게 명상과 사랑. 그룹과 개인. 양극이 공존하는 안식처임을 제 안의 또 다른 제가 느끼고 있습니다.
사부님. 어려운 고행의 길이 아닌 웃으며 편안하게 제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이제 진정 사람들도 삶도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고행 길을 가려 하느냐?”
사부님께서 지난 오프 수업 때 제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사실 그 말씀이 제게 박혔더랬습니다. 왜지? 왜 그런 걸까?
쉽게 답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제 자신 스스로 설명할 수 없음에도 그 길이 옳은 길이라 여기고 그 길을 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 길이 옳다라는 건 도대체 누가 혹은 어떻게 제 안에 주입된 사실이었을까요…?
오쇼 라즈니쉬의 책 한 권을 읽고 4백 권의 책을 쓴 그를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진리의 본질을 꿰뚫고 있음은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그대로의 덫에 걸려 저 역시 그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습니다. 저의 깨달음이 그의 발 밑에도 따르지 못하기에 제한적 시각으로만 그를 바라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두 가지 깨달음 속에 몇 가지 배움은 얻었습니다.
제가 고행 길을 가려 했던 것은 세상에 지쳐서 외적인 욕망을 니르바나 혹은 깨달음에의 욕망으로 대처했던 것이었습니다. 오쇼의 말을 빌자면 대상만 달라진 똑 같은 또 하나의 욕망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지 못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정화 작용도 거치지 않은 긴장감이 팽배해 있었기에 결코 이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제 눈에도 보입니다.
내친 김에 오쇼에 빗대어 저를 좀 더 살펴보고 싶어졌습니다.
첫째 저는 아직도 수행을 체험이 아닌 기도와 지식 쌓기로만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의식의 체험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기만 시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사회적 욕망은 그대로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고 싶은 분야로 겨우 전환하였기에 사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역시 배고픔이라 표현한다면 오쇼이 시각에서는 1단계의 욕망이 될 수도 있겠고 하고 싶은 일 자체가 문화, 예술계이니 2단계 욕구라 할 수도 있는 그런 어정쩡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직 제 안에는 3단계 영적인 수행 욕구가 그리 강하지는 않다라는 점입니다.
셋째 제겐 변경영에서의 지난 몇 달간의 시간들이 마치 명상을 준비하는 과정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안의 쓰레기를 보고, 치우고 그리고 조용히 침묵 속에서 명상하기. 이제 겨우 제 안에 어떠한 것들이 억압되어 자리를 잡고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버리는 작업은 동료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안에는 너무나 많은 “해선 안돼”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해야만 하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