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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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원을 마친 그 해 아빠가 돌아가셨다.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엄마는 결혼을 하라 하셨다.
맏사위로 집안의 커다란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선을 보았다.
결혼하자고 한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결혼 후에도 일을 계속해도 되냐고.
안 된다고 한다.
왜 안 되냐고 물어보았다.
애가 늦어서, 하루라도 빨리 애를 낳아야 한다고 한다.
그렇구나. 이 사람.
내 앞에서 밥을 꾸역꾸역 먹고 있는 이 남자.
애가 급해서 나랑 결혼하자는 거구나.
이 사람에게 난 뭘까? 애 엄마?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난 어쩐지 깊은 수렁으로 끌려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방문을 걸어 잠궜다.
살고 싶었다.
너무도 살고 싶었다.
아직 내 안에는 삶에 대한 욕구가 남아 있음이었다…
<2>
물론 제가 결혼하지 못한 이유가 사회적 관습만은 아니었겠지만 그 때 당시 제가 내린 결론은 사랑하니까 결혼하는거고, 결혼함으로 자연히 아이라는 축복을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혼하기 위해 만나고,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하는 것은 어쩐지 제게는 무언가 거꾸로 진행되는 억지로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사랑해서 결혼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그 흐름조차 세월과 함께 변했지만, 한 사람에 대한 소중한 기다림만큼은 지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저는 한 여름의 소나기 같은 사랑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함께하는 삶을 따사롭게 해 줄 수 있는 봄날의 햇살 같은 사랑이 좋을 것 같습니다. 상대에게 의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저도 그 분의 의지가 되고 쉴 곳이 되고 싶습니다. 때론 엄마처럼, 때론 친구처럼, 때론 연인 같은 동반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삶에 있어 남녀간의 사랑만이 전부가 아님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참 서럽습니다. 산다는 건 많은 아픔을 이겨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함께 갈 길동무들이 간절합니다. 서럽고 아픈 여정이지만 함께여서 좋은 우리들. 가오기들입니다… 그리고 등불같은 나의 멘토, 사부님.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향을 자아내는 믿음직한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변경영이란 뿌리를 딛고, 천천히 세상 밖으로 제가 먼저 손 내밀고 싶습니다. 엄마가 필요한 누군가에게는 엄마가 되어주고, 누나야가 필요한 누군가에게는 누나야가, 언니야가 필요한 누군가에게는 언니야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지금까진 고집불통 속만 썩히던 저였지만 이젠 하루가 다르게 주름살이 늘어가시는 엄마도 따듯하게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멀리 있는 제 동생, 마음으로나마 더 다정히 대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보잘것없고 이기심 많은 제게 이제라도 누군가를 허락하신다면
그 한 분도, 소중히 사랑하겠습니다…
제가 원했던 건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제 소망은 늘, 내면을 마주볼 수 있는 동반자와 삶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3>
사부님
제게 왜 화장을 하지 않냐고 물으셨죠…
지난 번 <고행>과 마찬가지로 얘가 혹시나 하는 염려이신 거 잘 알아요…
하지만 사부님. 저 이제 괜찮아요…
제가 화장을 하지 않는 이유는 오히려 반대인 것 같아요.
요즘의 저는 뭐랄까… 아프리카의 야생녀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 깊은 곳으로부터 생명력이 차오르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이대로 있을게요.
때가 되면 다시 다소곳이 거울 앞에 앉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세상에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해 정성 들여 화장을 하겠습니다.
저를 조금이라도 빛나게 해줄 액세서리도 찾아볼게요.
그렇게 밝고 환한 모습으로 언젠가는 세상 밖으로 걸어나가겠습니다…
하지만 사부님.
전 지금 이 순간이 그냥 멈췄으면 좋겠어요… 지금 이대로요…
연구원 생활이 왜 이리 빨리 흐르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