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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18일 21시 07분 등록
 

 

7월 오프 수업


주제: 지금까지 나를 만들어온 중요한 경험들 3개를 나열해보고

그중 하나를 골라 자세히 묘사해보라.

그런 연후에 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자신의 취향, 기질, 재능, 가치관, 믿음 선호 등등을 기록해보라.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길이가 뱀처럼 길고 꾸불거려서 이번에는 여행이라는 창을 통해 한 살이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먼저 오래 기억에 남아 잊히지 않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졸업여행이다.

경주로 갔었다. 우리는 석굴암에 앉아계신 무지하게 큰 부처님의 연좌를 돌며 중학교 입시에 원하는 좋은 학교에 붙게 해달라고 기원했었다. 그리고 태종 무열왕의 비석을 받치고 있는 거북의 발가락이 네 개이었던 것을 또록하게 기억한다. 특이했다.

  

우리는 당시에 정해진 숙소 여관에서 숟가락처럼 포개져서 자야했는데, 나는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다보니 누울 수가 없어서 앉아서 자고 있었다. 담임선생님께서 지나가시다가 그 모습을 보시더니 나를 안아서 더 넓은 방으로 데려다주셔서 잠을 잘, 잘 수 있게 해주셨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김유신 장군의 묘로 가는 길에 냇물이 불어나서 채 개울을 건느지 못하자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업어서 그 강을 건네주셨다. 그때 그 선생님의 등이 그렇게 믿음직하게 느껴졌고, 정감이 흐르던 그 얼굴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분, 권청문 선생님은 졸업할 때 가정통신문에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입니다.”라고 써 주셔서 그 후에 흐뜨러지는 행동을 하게 될 때마다, 다시 선생님의 그 말씀이 생각났고  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늘 깨어있게 하셨다.


 두 번째는 신영복 선생님의 정년퇴임을 기념하여 떠났던 “졸업 여행”이 기억에 남는다. 성공회대학 교수님들과 대학원 학생들, 더불어 숲 사람들로 구성되어 민족의 시원인 바이칼호수와 알혼 섬을 다녀왔다. 여행을 가는 곳도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고 함께 갔던 사람들도 정다웠다. 함께 갔던  더불어숲  <둘이오>는 저녁마다 우리를 위하여 7080 콘써트를 열어주었고 우린 밤을 새며 함께 노래하며 행복했다.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아 청정한 바이칼 호수와  끝없이 펼쳐진 초원은 태고의 신비로 우리를 안내했고, 온 천지에 가득 뿌려진  야생화는 별처럼 눈이 부셨다.

겨우 알파벳을 익혀 더듬거리며 읽던 러시아어 지명들도 재미있었고 환 바이칼 철도를 따라간 기차여행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기차에서 러시아의 민중가수를 만나서 <백학>을 주문했고 김창남 교수님은 <백만송이의 장미>로 화답했다. 무엇보다도 우이선생님과 함께 한 여행이어서 이르크츠크에 남아있는 데카브리스트의 흔적을 따라 가보고, 또 시베리아 유형지를 지나며 많은 상념들이 떠올랐고 또 흘러갔다. 이 여행은 성공회 대학에 기록 보관되어 있고 그때의 느낌들은 독립된 하나의 장으로 언젠가 한번  풀어내어야 숙제를 마치게 될 것 같다. 후제... 좀 시간이 지난 후에.


 세 번째는 한겨레 신문을 읽는 독자들로 구성된 <겨레산악회>의 멤버가 되어 백두산을 갔었던 일이다. 그때는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기 바로 전이어서 매우 긴장했었다. 겨레 산악회는 민족의 통일을 기원하며 등산을 할 때도 모든 대원이 다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순국선렬께 묵념을 하고  <통일의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선배들이 개척해 둔 그 길을 따라 안내를 받으며 배낭과 텐트를 짊어지고 갔었다.


여행의 목적이 겨레의 소원성취를 위하여 백두산과 천지에서 제를 지내는 것이었기에 비장한 마음을 안고 길을 떠났다. 우선 당시의 중국은 아직 우리에게 개방되지 않았기에 정보가 없었다. 겨우 학교도서관에서 하버드출신의 한국인 2세 법률가가 영어로 쓴 책을 번역한 책 한권을 구해 읽었다. 그 책에 의하면 중국에 가려면 먹을 것을 많이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고 여러 가지 생필품이 부족하므로 잘 준비해서 가라고 씌여 있었다. 그 작가는 중국어를 아주 잘했지만 지내기가 힘이 들었단다. 그래서 우리는 천지 옆에 텐트를 치기 위해서 40킬로짜리 배낭을 매고 깡통음식을 많이 준비해서 갔다. 짊어진 짐들이 아주 무거웠다.


그때 길에서 겪은 일들을 회상해보면 지금의 중국과는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난다. 중국에서는 기차표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고 가는 곳마다 넘쳐나는 인파로 평화가 없었으며 승무원이나 공안들이 매우 불친절했고 우리에게 명령에 가까운 잔소리를 해대는 것이었다. 외국인 여행객에게는 위안의 환율도 다르게 적용하고 입장료도 몇배나 더 비싸게 받으며 자국의 경제를 보호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나라 길로 백두산엘 오르고 싶었지만  그때는 이렇게라도 백두산을 향하는 일이 꿈만 같았었다. 그 당시 만해도 텐트를 짊어진 배낭여행객은 매우 신기한 일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어쨋든 우리는 외국인 신부님을 통해서 용정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흑룡강 성 출신의 매우 훌륭한 조선족 젊은이를 소개받았고 이 사람을 통해서 매우 많은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춥고 먼 땅 흑룡강 성에서 장학생으로 용정대학에 올 때 기차에서 민족의 젓줄이라고 어릴때 부터 가슴에 깊이 담아두었던  해란강을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일과 학업을 잘 마치고 교수가 되었지만 그 당시의 중국은 돈을 숭배하기 시작해서 여행가이드가 더욱 선망받는 직업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직업을 ~질이라고 분류했다. 그래서 선생질, 의사질...이렇게 부르고 있었다. 당연히 용정에 머물면서 윤동주의 학교와 선구자의 일송정과 해란강을 순례하고  “선구자”를 부르며 목이 잠기고 겨레의 염원인 통일을 우리시대에 볼 수 있기를  마음을 다해 기원했다.


그리고 드디어 8월 8일 장백폭포를 지나 천지에 이르렀고 백두산에 올랐다. 백두산의 맑은 모습을 보는 것은 일 년에 며칠이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런 행운을 얻었고 맑은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천지에서 백두로 오르는 산기슭의 야생화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백두산은 흰색의 마사토같은 화산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계속 바스러져 흘러내려서 좀 위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해에 먼저 갔었던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천지 옆에 텐트를 쳤다. 언제나 첫걸음이 어렵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관리하는 공무원에게 돈을 주어서 이런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 밤은 매우 감동적이었으나 너무나 추워서 오리털 침낭으로 한기를 해결할 수가 없어서 다시 같은 텐트에서 함께 묵던 선생님들과 숟가락처럼 서로 안겨서 사람의 온기로 겨우 그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에 새벽에 천지의 온천에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매우 엄숙하고 진정을 담아서 경건하게 백두산과 천지가 우리나라가 되도록 다시 빌었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자 다시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와서 그곳에 사는 조선족에게 모터보트 빌려 타고 천지로 들어가서 김일성이 풀어 키운다는 산천어를 잡아다가 아침부터 회를 쳤다. 함께 간 술꾼들이 만든 장면이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차를 타고 천문봉을 통해 백두산에 올랐고 그 감격을 마음에 새기며  하산을 하여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 닿아 천단 옆에 여장을 풀기위해 인력거를 탔다. 몇몇 젊은이들은 차마 할아버지가 힘들게 페달을 밟는 인력거를 타지 못하고 짐만 맡긴채 인력거 옆을 걸어서 갔다. 나는 할아버지를 기쁘게 하기위해서 매우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감사하며 인력거를 타고갔다.


짐을 풀고 천안문 광장으로 갔다. 천안문 광장엔 모택동이 큰 그림으로 나와 우리를 맞이했고  광장은 정말 넓었다. 자금성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보니 우리 경복궁이 생각났고  이곳에 갇혀 살던 사람들의 불행했을 마음들이 느껴졌다. 어쨌든 나중에 자유시간을 얻어 베이징거리를 돌아다녔는데 혼자 가다가 시장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더니 어떤 아주머니가 매우 험한 얼굴로 나를 쫓아왔다. 무서웠다.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났는데 나중에 가이드에게 설명을 들었다. 오랫동안 살아온 방식이 피해의식을 불러일으켜 사진찍히는 것을 그렇게  방어하는 것이란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더 무서웠던 것 같다.


나는 여행지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번에는 그냥 웃기만 하고 지나갔다. 말과 글을 익히지 못하고 가서 그랬다. 아쉬웠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 모두 비행기보다는 배를 타기로 했다. 독립투사들에게 공감을 해보고 싶고 또 서해를 지나 돌아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중국 배는 흔들림 없이 편안했다.

서해바다는 파도가 없이 조용했다. 그리고 30시간, 밤을 편안하게 잘 자고나니 벌써 아침이 되었고 인천항에 도착했다. 서해안은 정말 옹기종기 작은 섬들이 많았다. 엷은 회색에 드문드문 놓인 섬들은 평화로웠다. 이 배 위에서 일본 순사를 피했을 것이고 망국의 한을 가슴아파했을 선조들을 잠깐 생각했다.


인천공항에 닿은 배는 세관을 통과할 때 좀 어수선하고 불친절했다. 비행기보다 조금 경비가 저렴했지만 많은 인원을 수송하는 덕에 별의 별 구경을 다할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백사를 보았는데 이 백사는 불사의 명약이라 하여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하였다. 어쨋든 나는 이 뱀을 보았다.


큰 줄거리만 따라갔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를 안내한 최일성 씨의 뛰어남이다. 어쩌면 그렇게 민족정기와 성실성을 잘 갖추고 진정한 마음으로 자기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는지... 이런 젊은이가 있는 한  미래 또한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십시일반  모금을 해서 필요한 사람을 도우라고 그에게 맡겼다.


또 하나, 정확한 정보를 구하는 일의 중요성이다. 여행 중에는 주로 조선족이 경영하는 음식점을 찾아 매우 담백하고 옛스런 음식들을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물론 가이드의 안내능력이기도 하겠지만 지고 갔던 깡통음식은 소용이 닿지 않았다. 그리고 교통이나 산업의 발달이 낙후해서 우리의 60년대를 보는 듯했지만 여기서도 빈부와 학력의 격차가 많았다.


나는 시각을 활용한 기억이 뛰어나다. 한번 눈에 보여진 것은 오랫동안 생생하게 기억한다. 또한 책에서 배운 역사적인 장면에 다시 한번 가보는 것을 항상 원하는 것 같다. 이 특성은 알고 있는 것을 직접 체험함으로서 확실하게 이해하고 싶은 것 같다. 공부를 할 때에도 노트를 가지고 현장으로 나가보는 것을 참 즐겼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래서 꿈에서 보고 말로만 듣던 천지에 오르고 백두산을 올랐던 일은 잊지 못할 감동적인 사건이 되었다. 가슴 뛰는 순간이었으며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순간이었다.

나에게 닿아 나를 이끄는 이런 순간이 나는 참 기쁘고 또 고맙다.

  

나는 편견없이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를 좋아한다. 옛날부터 사해동포라는 말이 참 좋았다. 처음만나는 사람도 함께 웃으며 생각을 나눌수 있고 더 잘 알게되면 친구로 남아 오래오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람에게 성실하고자 하는 나의 가치관을 잘 따르고 있다. 여행길에 좋은 길동무를 갖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값진 선물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친절한 마음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더 나아가면 정다운 관계를 꿈꾸게 된다. 정답지 않으면 생각이 굳어버린다. 그래서 촉진자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그렇게 더 넓은 세계로 끝없이 나아가고 싶다.


지금까지 몇가지 여행을 통하여 그간의 삶을 정리 해 보았다.


글을 배우고 익히기 시작한 이래 <애국가>를 부르며 키워온 동해물과 백두산을 통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사랑은 나의 나이 마흔 셋에 다시 시작되었다.


비록 매순간 깨어있으며 앞장서서 이끌어 나가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내 마음에 각인된 통일에 대한 기원과 백두산에 대한 경건한 마음은 나의 후반 생애에 중요한 화두가 되어 언젠가 결실을 이루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이런 회상이 계기가 되어 민족애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숙제를 통한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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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희향
2009.07.19 12:16:16 *.12.130.72
언젠가는 진정 샘과 함께 여행을 떠났으면 합니다.
물론 크로아티아 여행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지만
지난 번에 말씀하신 제주 여행처럼 조금은 더 가볍고, 조금은 더 은밀한 그런 여행이요...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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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
2009.07.20 04:52:45 *.248.235.10
그래, 수희향...그러자.

그날도 잠깐 얘기했었지만,,,
나는 가끔 '생각'이 발바닥에서 나오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복잡한 문제들도 걷다보면 정리되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잘 떠오르거든...ㅋㅋ

그렇게 '우리는 느리게 걷자,걷자,걷자....' 
가볍고 은밀하게도 걸어보자...
더 멀리도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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