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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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발칸에서 ...
1
여행을 떠나기 전에
걱정이 된다.
먼저 휴가를 떠난
모두들 때문에
텅 빈 사무실에 머무르는 대신에
땡볕이기는 하지만
나는 부지런히
거리들을 지나
매장들을 다녀왔다.
솔직히
아무리 해결을 해도
끝이 없이 생겨나는 문제들과
아직 정리 되지 못한
문제들을 뒤에 남겨 두고
여러 날, 자리를 비워야 하는
미안함 때문이다.
2
새벽부터 부산했던 주말,
돌아오자 마자 책상머리에 앉았지만,
창 밖으로 쏟아지는 소나기에
보수 해야 할
매장의 비 새던 창문이 생각 나,
전화를 붙잡는다.
나는
현대인이 되지 못한다.
기계적으로 시계 속의 숫자가
규정 속의 영역을 벗어나면
손쉽게 일과 사무로부터
벗어나버리는 세대들의
태도를 부러워 할 만큼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나는 새로운 세대들의
현실화된 감각에 익숙하지 못한다.
마음 한 편엔
매몰차 보이는 듯한 그들이
때론 부럽기도 하다.
3.
한 차례 소나기와
시끄러운 벼락이 앞 집 너머에
요란하게 내리고 나서
한 동안
씻가운 동네가 조용하더니
왼 편 높다란 고층 아파트와
다닥다닥하게 붙은 다세대 주택 사이로부터
아이들의 즐거움이 담긴
신나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소리들을 듣고 있다가
문득, 여행길이 궁금해졌다.
가슴 뛰는 기대 없이 있다가
여행을 떠날 날이
다가 오자
머리 속이 뒤숭숭해진다.
큰 집을 떠나
둘 째 집에서 두고 온 손주나
집안 일들을 입에 달고 다시시던 어른들이
못마땅해 했는데
지금, 내 모양이 그 꼴이다.
4
이젠
젊은 날,
온 세상이 내 꿈을 향해 펼쳐져 있고
눕는 곳이 내 집 같아서
여느 낯 선 거리도 기회의 시간이었던
그 노마드적인 삶을 끝이 났나 보다.
아니면
겨우 비집고 선
작은 공간의 휴식처에 대한 안도감이
반사적으로 나에게
지난한 세월 사이에 놓인 엄청난 소란과 혼돈을
기억하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5
숨가쁘게 쫓기듯 살아온 세월 탓일까?
아니면 두려움 없는 도전과 용기가
사라져 버린 것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현란하게 변하는 세상으로 속도에
익숙해질 수 없는 적응력 때문일까?
입던 차림 그대로
문을 나서고
여느 낯 선 하늘 밑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칼날 같은 시간들 위에서
한 차 앞도 알 수 없는
깊은 밤의 안개 속 같은
길을 달리던 순간에도
거리낌이 없었던
희망과 기회가 넘치던 세상은
어디로 간 걸까?
아니,
그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6.
문득,
알게 되었다.
내가
그 뚜껑을 들썩이게 하는
뜨거운 불길 위에 놓인 그릇 같던
그 시간 속에 나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만
며칠 동안 입었던 옷들이
뒤엉켜버린 빨래더미가 쌍인 빨래통 속을 휘저어,
뒤죽박죽 한 채로 싸 안아 들고가
세탁기 통 속에 확 밀어 넣고는
뚜겅을 확 내려닫고
버튼, 두 개를 툭툭 누르고 돌아와 책상 앞에 앉듯이
그렇게
지난 날로부터 앞 날로 이어지는
오늘 속의 모든 생각들을
열 쇠 두 개로 채워버리고
떠나려 한다.
그 하늘 밑에는
고고한 자연과 엄숙한 역사가 숨쉬는
낯 선 거리의 아름다움도 있고
아득한 기억 속의 얼굴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늘,
‘살아있음’이 의미 있어지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7
아직,
맹목적이고 무자비한 인간의 편협과 잔인함이
다 식지 않은 잿더미 같은
화약고라 불리는
거기 발칸에 가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온전한 자연의 위대함 속에서
사람의 아픈 역사들을 지켜보면서
내, 죽어간 기억들을 위해
연민의 향을 피우고
살아갈 새 날들을 위해
희망의 축제를 올리리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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